[불교공뉴스-문화]끝날 것 같지 않은 고된 생활이 계속되었다. 수업을 마치고 나면 정신없이 집으로 휘달려왔다. 예식이 있는 날은 피아노 연주를 해야 했고, 나머지는 패스트푸드점에 나가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웨딩마치 연주곡을 막 끝내고 책장을 넘기려는 순간이었다. 커튼 뒤에서 작은 아버지가 나를 향해 손짓을 해보였다. 사진관으로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사진관에 내려갔을 때, 낯선 남자 둘이 막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러자 작은 아버지는 그들에게 매우 반갑다는 듯이 연신 허리 굽혀 악수를 했다. 이번에는 작은 아버지가 나를 그들에게 소개했다.
“우리 집 큰 딸년입니다. 그 물건이 이 아이 앞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상한가를 치고 있지요.”
“저는 그 산이 얼마나 올랐는지 관심이 없어요.”
냉랭한 내 말에 두 사람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작은 아버지의 얼굴이 검푸른 색으로 변하더니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은혜도 모르는 계집애 같으니·······.”
다리가 후들거려 계단을 오르기조차 힘들었다. 명치끝이 싸하게 아팠다.
밤 열한 시가 넘는 시간이었다. 작은 아버지가 사진관으로 내려오라고 했다. 급한 일이 생겨 심부름을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김 사장 집에 들러 서류를 전해주라고 했다.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서류 봉투를 들고 거리로 나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땅바닥 밑으로 갈고리를 세운 바람이 회오리를 쳤다. 우산이 뒤집힐 정도였다. 김 사장 집은 걸어서 20분쯤 되는 거리에 있었다. 언젠가 작은 아버지의 심부름을 갔었던 적이 있었다. 그 곳은 민가가 드물었고, 지나가는 차량도 뜸했다. 쓰고 있던 우산이 벌렁 뒤집히면서 도로 위로 나뒹굴었다. 가지고 간 서류 봉투를 젖지 않게 하려고 몸을 바짝 구부렸다. 치맛자락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마을 입구에 접어들자, 희미하게 불빛이 보였다. 신발이 벗겨지지 않도록 발끝에 힘을 주었다. 그 집 대문 앞에 이르렀을 때 울안에서 개가 컹컹 짖었다. 넓은 정원과 커다란 돌 장식이 있는 연못이 눈에 들어왔다. 초인종을 누르자, 뚱뚱한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어주었다. 남자는 치켜 올라간 눈썹을 연신 움찔거렸다. 입고 있는 옷차림새로 보아 집주인같지는 않았다. 내 머리카락에서도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거실로 안내된 나는 잠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어느새 12시를 지나고 있었다. 그 뚱뚱한 남자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내심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검은 색 승용차 한 대가 집 앞에 섰다. 어디선가 나타난 그 남자가 재빨리 달려가 문을 열고 우산을 받쳐 들었다. 차문이 열리고 안에서 두 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한 명은 회색 양복을 입은 노인이었고, 한 명은 검은색 점퍼 차림의 젊은 남자였다. 안으로 들어선 두 남자는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방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벽에 걸려 있던 거울 속의 내 모습과 마주쳤다. 젖은 옷이 몸에 감겨 속살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똬리를 틀며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두 남자가 방에서 나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들이었다. 나이든 남자가 전시품을 감상하는 듯 나를 바라봤다. 불쾌한 눈빛이었다.
“서로 인사들 해. 앞으로 친하게 지내도록 해라.”
“단지 심부름을 왔을 뿐인 걸요.”
“무슨 소리야. 이 자리는 맞선자리야.”
나는 현관문을 와락 밀고 그 집을 뛰쳐나왔다. 점퍼 차림의 남자가 뒤따라 나왔다. 그가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빗소리에 파묻혀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마 우산을 쓰고 가라고 했던 것 같았다. 뒤도 보지 않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오직 그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수구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도로 가장자리 연석선마저 빗물에 젖어 보이지 않았다. 멀리 차 한 대가 미끄러져 오고 있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도로 위에 깔렸다. 갓길로 몸을 피했는데, 돌연 차가 끽 하고 멈추어 섰다. 차문이 열리고 모자를 푹 눌러 쓴 한 남자가 내려서더니, 나를 차 안으로 거칠게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입에는 테이프가 붙여지고, 두 손은 뒤로 포개진 뒤 밧줄로 묶여졌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남자의 형체가 거무스레하게 드러났다. 몸을 비틀며 비명을 질렀지만 끙끙대는 소리만 날 뿐 목소리가 테이프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이마에 땀이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차는 전속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물보라 소리가 쏴~ 하게 들려왔다. 달리는 차창너머로 보이는 잿빛 하늘은 먹구름을 가득 받아 내리고 있었다. 부표처럼 떠 있는 나뭇가지는 이리저리 휘적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운전석에 앉아 있는 남자의 뒤통수를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멀리 붉은 신호등이 깜박거렸다. 질주하던 승용차가 멈추고 섰다. 찰칵, 찰칵, 찰칵 초침 간격으로 심장이 쿵, 쿵, 쿵 뛰었다.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조차 보이지 않았다. 빗줄기가 거세졌다. 굳어 있던 가슴을 펴고 긴 촉수를 뻗어 차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렁그렁하니 내 눈 속에 고여 있던 물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차가 서서히 속력을 줄이기 시작했다. 얼핏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갈전마을이라는 푯말이었다.

<이경 장편소설> 『 탈 』은 불교공뉴스 창간기념 작품으로 2012년 봄날 출간예정>

 

저작권자 © 불교공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