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현스님(KCRP종교간 대화위원, 열린선원 원장)

[불교공뉴스-종교]아시다시피 이 정배목사님은 그 신학적 배경이 변 선환목사님 등의 지도와 연구과정에서 유 영모선생의 철학적 뿌리인 중국철학을 잘 소화시켜 현대적으로 그리고 부드럽게 활용하는 학적, 실천적 경향을 이어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KCRP의 종교간대화위원회,종교와평화 편집위원회 그리고 몇 차례의 직, 간접적인 관련 세미나와 스터디 그리고 이슬람과의 대화를 위한 중동종교유적 순례와 이슬람지도자와의 대화모임을 이끌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이번 세미나의 주제를 영성에 기초한 부드러운 생태 지향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이해하여 목사님의 의견에 많은 부분 동의합니다. 통섭(通攝),상보(相補),연기(緣起)는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보충하는 입장에서 몇 가지 여쭙고 의견을 보태고자 합니다.

무원론(無元論)-지속 가능,다양성, 평화의 토대
어떤 것도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다름의 존재가치를 이해하는 것은 평화의 필수조건이 되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배경에는 우주의 근원이 몇인가에 관한 이론 즉 원론(元論)이 자리 잡고 있다. 물체를 쪼개 들어가면 그의 원형질인 물질(物質)을 만나게 된다. 물질을 더 작게 나누어 가면 가장 작은 알갱이어서 근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던 원소(元素)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가장 작은 것이라고 생각한 원소가 자연계에 105종이나 있다. 그 가장 작다고 생각한 원소를 5종이나 더 만들어 현재는 110종의 원소가 있다고 한다. 그들 원소들 또한 아주 작은 알갱이와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을 쪼개고 또 쪼개면 가장 작은 형태의 원형질(原形質)을 찾아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과학자와 철학자를 중심으로 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어떤 최초 출발자가 우주 생성 최초에 있어서 또는 그에 의해서 우주가 만들어져서 다른 것들도 어떤 프로그램에 의해 계속 만들어지고 나타나게 되리라는 가정에서 정립한 이론이 바로 원론(元論)이다. 우주의 가장 작은 물질 또는 최초의 원인을 원(元)이라 한다.

당연히 가장 작고, 최초 원인이므로 그것을 하나라고 보는 것이 일원론(一元論)이다. 절대자인 유일신(唯一神)을 믿는 사고체계에서 출발하였고 그러한 사고에 합당한 이론이다.

그런데 인간과 인간이 발명한 자연과학 기구를 아무리 발전시켜 관찰해 보아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완전히 재현하면서 바라볼 수도 없다. 또, 가장 작다고 생각하는 것도 관찰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그것은 어쩌면 하나가 아닌 두 개가 아닌가 하는 사고가 생겨났다. 그것이 바로 이원론(二元論)이다. 예를 들면 물질과 마음이라는 두 가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원론 또한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나타나면서 다양한 근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등장했다. 이를 다원론(多元論)이라 한다. 이는 다민족, 다종교, 다 국가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평화를 이룩하는 데는 효용성이 큰 이론으로 생각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일어난 종교다원주의는 그러한 현상의 하나일 따름이다. 일원론이나 이원론에 비하면 다원론이 그나마 받아들일 틈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곳곳에서 다른 대안이 없는 것처럼 많이 쓰고 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다원은 단어 안에 논리적 모순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가장 작은 근원은 논리적으로는 하나라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도를 중심으로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라는 불일불이론(不一不二論)이 나타났다. 이는 줄여서 불이론(不二論=non-dualism)이라 하기도 한다.

둘이 아님이라는 말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그래서 쓰임도 많다. 하지만 둘이 아님이라는 말은 둘은 아니어도 셋이나 넷 또는 그 이상이라는 추론도 가능한 것이어서 단어 자체에 문제를 가지고 있다. 불이(不二)라는 말도 불이(不異)라는 단어로 대체되어 ‘하나도 아니며 많은 것도 아니다’ 또는 ‘하나로 같지도 않고 많아서 다르지도 않다’는 개념으로 쓰기도 한다.

모든 것들의 근원이 하나라는 일원론(一元論)은 이미 부정되고 증명이 불가능한 것이며, 둘 이상은 단어와 논리 자체에 모순이 있는 개념이다. 이원론이나 다원론 또는 둘이 아니라는 이론보다 단순하면서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은 혹시 없을까? 서로가 서로를 감싸 안는 사상, 근원이라는 절대적 가치를 찾아내지 않는 사상이 있지 않을까?

어떤 근원을 가정하면 근본주의에 빠져서 다른 사상들과 다투기 쉽고 근원이 없다고 하는 무원(無元)이라야 평화로운 생태가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서 필자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이 시대의 새로운 사상으로서 무원론(無元論)에 입각한 무원주의(無元主義)-amonism(無元主義) based on amonitheory(無元論)-를 진지하게 생각하고자 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가장 작은 하나의 점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어느 존재를 향해 끝없이 나아간다고 해도 끝내 하나의 점이나 하나의 근본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귀일(歸一)하지 말고 그냥 두면서 평화로운 감정을 느끼면 하나인 듯 한 것이 아닐까? 모두가 대롱으로 보면 사마리아인이지만 잘 보면 그 앞에 ‘착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을까?

2.틀림에서 맞음으로의 회통적 시각
교통의 발달과 통신망의 진화를 통한 정보공유의 지구촌 시대를 맞이하여 인류는 여러 가지 커다란 경험과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이전에는 전혀 만나지 못했던 민족과 문화를 한 자리에서 만나기도 한다.
 
이른 바 화상전화(畵像電話)를 통해 서로 만나지 않고도 만난 것처럼 여러 가지 자료와 사람을 앞에 두고 느낌과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소통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직접 경험하면서 붓다가 지녔던 능력 중에서 이마에 있었다고 하는 흰 털에서 나오는 백호광명(白毫光明)의 위력을 보는 듯도 하다.

그러다 보니 정말 하루가 다르게 지구촌 가족들의 의식구조가 변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서로 다른 민족(異民族)들이 한 자리에서 회의를 하는 모습을 보면 흔히 틀린(誤) 사람들이 모였다는 잘못된 표현을 하였다.

살갗의 색깔이 다르고, 눈동자의 빛깔이 다르며, 코의 높이가 다르게 생긴 것을 틀리게 생겼다고 보았다. 보는 자인 나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에서 형성된 의식이며 그 의식의 표현이었다.

틀린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다 보니 생각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틀린(誤) 사람이 아니라 다른(異)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같은 씨족 가운데 가장 가까운 친척도 다르게 생겼고, 한 집안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다르게 생겼다는 것을 생각해보니 그랬다.

더더욱 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형제자매들도 제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깨달음도 조금 시간이 지나니 다른 사람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류라는 뜻에서 같은(同)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자연과학적으로는 105종 원소의 유기적 결합을 나름대로 한 모습이 각각의 존재이므로 구성요소가 거시적으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지,수,화,풍의 4대로 이루어졌으므로 역시 거시적으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어느 하나 빼 놓지 않고 어느 부처님의 전생이며 나의 부모형제가 아닌 이가 없다. 같은 사람임을 알게 되니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조금씩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틀린 것이 아니라 맞는(正) 것임을 알게 되었다. 각자의 처지와 시각에서 다르게 보였던 것이 틀리게 느껴졌었으나 이제는 맞게 느껴지게 된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눈으로 보면 어리석은 이의 어리석은 행동도 부처의 전생이거나 현생의 행동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내 몸이니 아끼고 사랑하자
모든 생명체는 고통을 싫어하고 행복을 추구하며 삶을 보전하기 원한다. 모든 건전한 활동은 자신과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다.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계율을 지키지 않고 야만적 본능을 따라 나쁜 짓을 하면 자신의 삶의 질이 떨어지고 수명이 짧아진다. -『디가 니까야』 「차카바티시하난다 숫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다른 이를 보호하는 것이고, 다른 이를 보호하는 것이 나를 보호하는 것이다.”라고 한『쌍윳따 니까야』

모든 존재(생명체)는 태어나야 할 것들이고 행복해야 할 것이다. 어머니가 일생 자녀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듯이 모든 생명체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수양해야 한다. 무한한 자비심을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증오와 적개심 없이 온누리에 펼쳐야 한다. 서 있든, 앉아 있든 ,누워 있든 그가 깨어 있는 동안에는 이것을 마음속에 두고 발전시켜야 한다.
 
이것이 바로 가장 고귀한 삶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이용관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그럴 때는 ‘꿀벌과 나비가 꽃의 향과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고 꿀을 모으듯이’해야 한다.-『시갈로바다 숫따』-

해결해야할 과제
1)개념의 문제
㈠ 명칭: 이쯤에서 우리는 우리모임의 주최단체인 한국종교인평화회의라는 이름을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살피건대 종교인평화회의는 종교인 사이의 평화를 추구하는 뜻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대로 필요한 이름이고 우선해야하는 목표를 제시하는 이름이기도 하기에 꼭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것만으로는 무엇인가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처음에 지을 때는 종교 간에 다투지 말고 평화를 이뤄서 사회평화를 이끌자는 취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필요한 것은 부족한 것이다. 당시는 이 승만 정권을 이어서 기독교 위주의 사회분위기가 팽배했었고 이에 맞서서 불교 중심의 민족(동양) 종교를 보호하고자 하는 사회분위기가 부딪히던 때였다.

그것은 어느 쪽에도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한 선각자인 강 원룡 목사, 변 선환목사를 중심한 대화론자들이 출교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화를 시작했다.

대화를 이끌어갈 단체를 만들어서 기독교 내부의 변화를 도모했으나 어려움을 겪은 바 있고, 안에서의 움직임을 북돋아줄 연대기구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세계의 흐름을 받아들이면서 1986년에 WCRP(World Conference on Religion and Peace)의 아시아지부(ACRP)를 만들면서 한국종교인평화회의를 결성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지부의 이름에 인(人)을 넣으면서 해석이 달라진 것으로 생각한다.

질문)생각건대 영어 이름과 같이 “한국종교인평화회의”를 “한국종교평화회의”로 해야 하지 않을까? 한국종교인 평화회의는 영문 이름을 Korean Conference of Religions for Peace라 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하는지 모르겠다. 세계 모임의 아시아 지부, 한국지회를 표방하면서 다른 단체처럼 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본부와 같이 표기하고 우리말로는 한국종교평화회의(또는 종교와 평화회의 한국지부)라야 하지 않을까?
㈡언어: 은유라는 표현이 좋다. 좀 더 생각할 것은 뜻이 하나로 변하지 않아야 하는 사인(sign.符號)과 여러 뜻을 가진 심볼(simbol.象徵)의 의미를 살려 다양한 마음을 포함할 수 있어야 함. 견(見)과 관(觀)은 주로 주간에 활동하는 존재들의 눈과 야간에 활동하는 존재(올빼미)의 눈으로 구분해 배대해서 의미를 찾아내려는 것은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㈢실무자에 대한 합당한 대우의 의미와 대안은?

2)사업의 문제
㈠이 정배목사가 제기한 바대로 사업위주의 단체가 된 것도 문제이지만 사업의 추진 뒷받침인 재정에 대한 회비나 사업수익 그리고 성금수입의 비율이 낮아서 정부 지원 사업으로 꾸려나가다 보니 자체역량강화 사업을 하기에 벅찬 것이 더 문제임

㈡대표자 또는 종단(교단)의 입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풀뿌리 대화로 확산하는데 어려 움이 있으며, 대화가 필요한 곳에 참여 유도 또는 확산을 하지 못하고 있음. 현재
대화를 하고 있는 단체나 참여자들은 실상 대화를 잘하고 있음.

제안)풀뿌리 대화모임을 많이 만들고 7대 종단이라는 용어를 통해 경직된 구성원을
만들지 말고 다양한 그룹의 모임과 개별참여자들을 확대하자. 그리고 참여자의 책임
의식과 의무를 확대하자(회비납부 및 행사 프로그램 참여).

질문) 흔히 7대종단이라고 하는데 종단과 교단의 차이, 종단과 종파, 교단과 교파의 차이 등은 어떻게 표기해야 하는가?

3)분리의 문제
㈠기독교 내의 이념적 프리즘이 둘로 나뉨에 따라 종교(간)대화 모임도 둘로 나뉜 것 도 문제지만

㈡종지협이 대표자만의 결정, 집행기구를 전체기구에 확산하는 무리수를 두고
있는데다가 KCRP도 어느덧 대표자 또는 종단(교단?)을 대표하는 모임으로
구성하여 자발적이고 진취적인 모임이나 대화 또는 사업이 이뤄지지 않고 있음

질문)기독교 안에서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다면 다른 종교가 어느 한 쪽을 택해서
가입하도록 유도해야 하지 않을까? 그나마 양쪽에 참여하도록 놓아두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KCRP참여 수장님들이 이 문제에 관해 진지하게 토론하는 장을
만들어 긍정적인 결론을 찾아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4) 사회적 의제 선도 및 대응
(일인독재를 찬성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과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의 안전과 발전 그리고 이북동포를 포함한 우리 민족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김정은 시대의 연착륙이 나라와 겨레의 통일번영에 이바지한다는 견해 안에서 바람직한 대응을 해야 한다.

현재처럼 초당적 대응 속에서도 자유로운 의견을 제출하고 그를 모아가는 민주적인 방법론이 필요하다. 그간 우리 사회의 제일 큰 문제가 여야와 시민 종교단체를 막론하고 정당한 방법론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성급한 결론을 내리다 보니 이기주의적 불통현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가 현재 정권을 쥐고 있는 여당과 정부의 잘못이고, 이를 견제하고 제대로 된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야당과 시민 사회단체 이들을 지도해야 하는 교육계와 종교계에서도 잘못에 대한 비판과 항거만이 능사가 아니라 제대로 갈 수 있도록 큰 틀의 연대를 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되면 안에서 다투지 말고 조문하고 싶은 이들은 마음대로 조문하게 하고 정부에서는 북한과의 내부적 외교관계를 차근히 다져가는 기회로 활용했으면 한다.

그것이 천안함, 연평도 사건에서 우리가 얻은 교훈이라 할 것이다. 무조건 퍼주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일견 그럴듯한 주장에 의해 교류와 지원을 막은 것에 대한 결과가 오히려 더 많은 지출과 상처를 입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그것은 통일 기회비용을 늘리게 되었을 뿐인 것이다.

대통령이 종교지도자와 여야지도자를 만나서 의견을 청취하고 보다 유연한 자세를 강조한 것은 한 걸음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마침 북에서 남측의 모든 조문을 받겠다고 한 것이 기회라고 본다.

94년처럼 갈등의 요인으로 삼지 말고 해결의 열쇠로 삼는 것이 대승적 자세라고 본다. 우리민족은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음을 상기했으면 한다.

그리고 그것이 북한사람들의 마음을 보다 더 자유지대로 향하게 하는 촉매제로도 작용함을 생각했으면 한다. 이미 북한은 거대한 흐름에 합류했다. 조금 더 진전이 있기를 바란다.)-불교계 매체에 보낸 글의 일부-
....이런 사회적 의제를 선도하고 대응하는 것이 필요할 텐데.. 무슨 의견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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