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배교수(KCRP 종교간 대화위원장, 감신대)

[불교공뉴스-종교]국내에서 일어난 종교간 대화운동의 역사가 근 50년에 이르고 있으나 답보 상태에 처해있다.

대화운동을 발의했던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열정과 문제의식 그리고 순수성이 오히려 사라진 듯 보일 정도가 되었다. 마치 시간이 흐르면 초창기 신앙운동이 형식적으로 변하듯 대화운동 역시 길지 않은 역사 속에서 그런 수순을 밟고 있는 듯하다.

조직과 기구로 명맥을 유지하고 그 안에서 종파의 유/불리를 셈하는 행태는 대화운동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일로서 극복해야 할 과제다. 하여 종단 대표들의 헌신적 의지와 대화운동에 참여하는 각 종단 실무자들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 되었다.

조직과 기구를 통해 종단의 권익을 지키려는 노력이상으로 이 속에서 자기 종교의 가치실현을 선행과제로 삼으란 말이다. 종교 본연의 힘이 회복될 때 종교간 대화 운동 역시 옳게 회복되리란 것이 앞선 이들의 확신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실상 종교간 대화와 협력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종단 내 교파 간 일치운동(Ecumenical movement)의 난맥상을 볼 때 상호 다른 종교들과 하나 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적 상황에서 한국종교인 평화회의(KCRP)와 종교지도자협의회(종지협)가 공존하고 있는 현실도 결국 교파 간 불일치 탓이라 하겠다.

이렇듯 문제의 원인이 기독교 측에 있긴 하지만 이런 이원적 구조를 묵인하고 그 틀에 안주해온 이웃 종교 측에도 아쉬움이 없지 않다.

양분된 기독교 연합단체에 동시적으로 참여하는 일 자체가 대화운동의 취지와 목적을 벗어난 정치적 산물이고 무엇이 종교간 일치 이념에 사상적으로 부합하는 가에 대한 판단유보의 결과란 생각 탓이다.

후술하겠으나 여하튼 두 단체가 공존하는 상황을 종식시키는 것이 우리의 과제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비슷하기에 상호 밀쳐냄이 있고 전혀 다르기에 끌림이 생기듯 한국적 상황에서 종교간 대화운동이 교파 내 일치 운동보다 용이할 수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동일한 세계관에서 태동된 종교들 간에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변증법적 대화’가 요구되나 낯선 세계관을 배경한 종교들 간에는 ‘대화적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정설로 믿고 싶은 것이다.

주지하듯 초기 각 종단 내 선각자들이 종교간 대화운동을 주창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3.1 독립선언서의 전통을 복원시키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如海 강원용 목사는 종교간 대화 운동의 출발점을 본 사건에서 찾았다.

민족 독립을 위해 동학(천도교)과 기독교 그리고 불교 대표자들이 함께 뜻을 모았고 후일 유학자들 역시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의지를 천명한 것 등은 기독교 서구로선 낯선 경험일 것이다.
 
이제 몇 년 앞으로 다가온 2019년이 되면 종교간 대화 운동을 시작한 지 백년의 역사를 맞이한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한국 종교들의 현실이 당시의 깊이와 넓이를 지닐 수 없고 현실문제와 맞닥트리지 못한다면 그들의 존재이유는 반감될 것이며 시민들로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조만간 한국사회는 자신을 무신론자라 커밍아웃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지고 집단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유물론적 진화론의 등장과 제도종교의 타락상이 주된 원인이 될 듯싶다.

이점에서 종교인들은 머리를 맞대고 차이를 넘어 공통의 과제 앞에 당당히 자신을 들어내야만 한다. 제도나 교리로서의 종교에 대한 관심이 실종되는 정황에서 이런 노력은 종교의 생사와 연루된 사안이기도 할 것이다.

실상 이런 종교간 일치 경험이 한국 땅에서 역사적 사건화 될 수 있었던 것은 서구와 다른 종교풍토 때문이었다. 필자는 이를 이원론적 차등주의의 서양과 일원론적 상대주의를 표방해온 동양간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주지하듯 성속의 구별에 익숙한 서구전통은 동일성 철학을 잉태했고 그에 근거 뭇 차별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동양 전통은 체용(體用)론에 근거하여 근원적 일자(一者)가 다양한 방식으로 현현했음을 믿었다.

현상적 차이는 근원적 일자가 상호 다른 방식으로 들어난 것이라 여겼기에 성속의 구별은 물론 타자를 배제하는 동일성 사유가 자리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차이는 더욱 본질적으로 동서양 사유의 근원처가 각기 주역(周易)과 플라톤 이데아론에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현실을 이념의 그림자로 보아 양자를 가치론적으로 구별했던 플라톤 이데아론이 질서로부터 혼동을 강조했다면 주역은 거꾸로 혼동으로부터 질서를 說했기에 가치론적 차등주의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금씩 달라지곤 있으나 지금껏 서구 기독교는 물론 아랍종교들 또한 배타주의를 기본 정조(ethos)로 삼은 것은 이런 이유라 하겠다. 하지만 서구 기독교를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들과 다른 경험을 창출한 한국 기독교의 경우, 그 속에 체용적 가치관이 자리(토착화)했다.

점차 서구화되는 과정에서 희미해져 버렸으나 민족주의를 표방했던 당시 기독교는 정치적 차원뿐 아니라 문화적(세계관적)으로도 한국적이었던 것이다.

역시 후술하겠으나 여기서 필자는 종교간 대화 운동의 향방이 실천적 과제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예수와 붓다가 무슨 상관이 잇는가를 묻는데 까지 이르러야 함을 말하고 싶다.

그간 필자는 운동이라 불리기는 어렵겠으나 다양한 형태의 종교간 대화 모임에 참여하며 이웃종교인들과 책을 함께 읽고 수행을 같이 했으며 한 방에서 먹고 마셨고 종교적 주제를 놓고 난상토론을 벌인 적도 수없이 많다.

신(神)의 존재와 체용론이 힘겹게 토론되었고 신정론과 연기설에 터한 불교적 악의 관점이 팽팽하게 맞선적도 적지 않았다. 원죄와 탐진치의 관계 그리고 믿음과 수행 역시 머리를 맞대었던 주제였다.

때론 생태계 위기를 풀어내는 제 종교의 관점도 서로 나눌 수 있었다. 스님들이 기독교 서적을 읽었고 신학자들이 불교 책을 갖고 자신의 관점을 제시했으며 유교학자들이 불교적 시각을 평가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자체를 종교간 대화 운동이라 명명해도 좋을 듯싶다. 즉 대화운동이 실천의 자리에서만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 논의 차원 역시도 대화 운동의 본질에 속한다는 확신 때문이다.

최근에는 인간은 정말 변할 수 있는 존재인가?를 주제로 각 종단 소속 학자들의 진솔한 고백을 상호 나눈 적도 있었다.

진솔함과 솔직함 만 있다면 종교간 대화 운동은 지금보다 조금은 나아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저마다 교권을 등에 없고 종단을 대표한다는 생각 때문에 때론 솔직성을 잃었고 권위적 사고를 떨쳐버릴 수 없었으나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가면 외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통하지 않는 말이 없음을 발견한 것이다.
위 주제에 대한 한결같은 대답은 인간은 쉽게 달라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외적 은총만으로, 단박의 깨침으로 인간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은 현실에서 쉽게 생기(生起)하지 않는다.

종단의 차이는 그야말로 외적인 껍질에 불과했다. 그 속에서 숨 쉬며 살아가는 성직자들의 고뇌는 형식은 달랐으나 내용에 있어 같다는 것이 탐색의 결과였다.

이렇듯 여러 모양으로 종교간 대화 모임에 참석했던 경험에 비춰볼 때 서구에서 제시한 종교간 대화 유형이 기독교적 시각을 반영한 것만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그 어느 유형으로도 현실을 옳게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우선 자기 종교만의 절대 우위를 강조하는 배타주의가 기독교의 경우 뿐 아니라 최근 아소카 선언에서 불거졌듯 불교에도 해당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자기 종교의 시각에서 이웃종교를 이해하려는 포괄주의 유형도 종교가 의당 보편성을 추구하는 한에서 어느 종교도 이런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다원주의 역시도 상호 관계성을 설명치 못하는 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될 수 없는 여지를 남긴다. 차이로만 끝나버린다면 차이에 터한 자기주장은 결코 포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천(正行)의 차원에서 종교간 대화를 수행하는 것 또한 필요하나 충분치 못하다. 실천으로 종교를 환원시키는 것은 종교의 윤리화를 뜻하는 것으로서 성속일여(聖俗一如)와는 같지 않다.

여기서 필자는 종교언어의 절대화를 포기하고 그것이 주는 은유적 의미에 주목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 기독교가 은총(恩寵)을 말하고 불교가 연기설(緣起說)을 강조하며 그리고 원불교가 사은(四恩)사상을 역설하고 천도교가 시천주(侍天主) 주문을 외우는 것은 모두 인간은 관계적 존재로서 자기 혼자만으로 인생을 살 수 없다는 가르침을 주기위한 방편이란 것이다.

종교언어란 어느 경우든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it is, but it is not) 은유적 성격을 지녔음을 인정하란 말이다. 연기설이 상호 의존적 관계성을 지시하는 한 연기설은 창조주의 은총을 신뢰하는 기독교와 은유적으로 만날 수 있는 개념이다.

몇 해 전 고인이 된 신학자 D. 죌레는 기독교의 은총을 이렇게 풀어 낸 적이 있었다. ‘은총이란 최상의 것을 거저 받았다는 고백이다’라고. 우리는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천지(자연)와 동포와 사회를 무상으로 받았고 하늘을 내 속에 값없이 모셔 살고 있는 존재이며 이렇듯 관계의 그물망을 토대로 했다는 점에서 은총의 존재임이 틀림없다.

하여 삶이 은총인 것을 고백하며 그 은총에 걸 맞는 삶을 사는 것이 종교이고 그것을 표현한 것이 종교언어라 생각하면 이웃종교를 수용하는 폭이 훨씬 더 넓어 질 수 있을 것이다. 인격적 하느님 이해에 경도된 기독교 역시도 이점에서 은유(metaphor)적 차원을 깊게 성찰할 필요가 크고 많을 것이다.

이를 위해 하이데거의 시간성 개념의 한계를 지적하고 종교를 풍토(공간성)와 관계시켜 새롭게 이해한 와쓰지 데쯔우로의 <풍토와 인간>이란 책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 도움이 될 듯싶다.

물론 그 역시도 결정론적 시각을 피하기 위해 풍토를 절대화하지는 않았으나 기독교 서구가 간과한 점을 공간의 시각에서 적시한 공이 있다. 그의 요지는 풍토가 인간의 자기이해를 결정 짖는 토대이고 인간의 자기이해의 빛에서 종교적 표상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자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몬순형 풍토의 불교, 자연(사막)을 극복해야만 생존 가능한 히브리 종교(기독교) 그리고 자연이 질서(코스모스)로 이해된 희랍적 세계관에서 궁극적 실상이 저마다 달리 표상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수용적 인간상, 의지적 인간상, 합리적 인간상에 터해 업(業)사상이 출현했고 초자연적 인격신이 등장했으며 합리적 철학이 전개된 것이 바로 문명(종교)의 발상지의 초기 모습이었던 것이다.

사막풍토의 초자연적 신관이 희랍의 합리성과 조우한 결과가 가톨릭 신학(존재유비)이며 히브리 신관이 알조 량이 부족한 유럽 북서부에서 인간 내면성을 강조한 종교(신앙유비)로 발전된 것이 개신교라는 위 책의 지적은 종교의 절대화를 피할 수 있는 상당한 근거가 된다.

종교 자체가 목적이 아닌 방편이란 생각을 더한층 배울 수 있는 까닭이다. 이점에서 필자는 세계관과 종교의 관계를 물과 물고기의 관계라 정리할 수 있었다. 물과 물고기를 둘로 나눌 수 없듯이 세계관과 종교 역시 불이(不二)적 관계일 수밖에 없다. 세계관은 앞서 본대로 자연(풍토)을 근간으로 한다.

어떤 자연환경과 만나는가에 따라 인간의 자기이해에 차이가 생기며 종교적 표상이 달리 구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에 터한 세계관의 차이란 자연스런 것일 뿐 결코 가치 판단의 대상일 수 없다.

이 경우 차이는 레비나스의 말대로 이웃 종교인들에게 각기 ‘초월’로 밖에는 달리 경험될 수 없다. 초월이란 말은 이런 경우에 사용될 수 있는 말이다. 따라서 종교간 대화 운동은 이웃 종교에게서 자기를 뛰어 넘는 초월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 초월은 결국 인간이란 존재가 은총의 존재인 것을 자기 언어로 재확인시키는 결과를 가져 올 뿐이다. 필자는 이를 ‘자기 발견의 해석학’이라 부르며 결국 종교란 ‘관’(觀)을 갖는 일로서 정리하고프다.

모두가 보는 ‘견’(見)의 세계와 달리 아무도 보지 못하는 캄캄한 밤에 부엉이가 볼 수 있는 것을 일컬어 ‘觀’이라 한다. 일상 見의 세계에 살고 있다면 우리는 종교적 인간일 수 없다.

아무리 종교적 언어와 의례에 익숙하다고 해도 말이다. 오로지 은총의 감각을 회복할 때-상호 다른 종교언어를 사용할 지라도-우리는 ‘觀’의 사람이며 종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종교간 대화는 이웃 종교인들도 ‘관’에 의거 은총의 삶을 살고 있음을 새롭게 발견하는 자리라 생각한다. 이렇듯 이웃 종교에 대한 자기발견의 눈(觀)을 갖기 위해 우리는 자기 종교에 대해 의심의 눈을 돌려야 한다.

맹목적 헌신은 자신의 종교를 세상의 독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종단을 향한 신앙의 눈만을 신도들에게 강요한다.

하지만 자기 발견의 눈을 위해 우리는 자신이 헌신하는 종단과 종교에 예리한 의심의 해석학을 발휘해야만 하는 것이다.

자기 종교를 비판적으로 볼 수 없다면 우리는 종교언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전보다 더 많이 경전을 읽고 표리부동한 종교 세계에 대해 의문을 품어야 할 것이며 더 많이 향유코자 기복적이 되어가는 자신을 아프게 성찰해야 옳다.

종교를 의지하되 맹종치 말 것이며 신도를 수단화하는 성직자들을 멀리하며 종교 경전을 이데올로기화 하는 가르침을 거부하고 종교 지도자들의 독선을 경계해야 할 책임이 있다.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은 듯하다. 하지만 본고의 주제에 관한 필자의 생각이 간헐적으로나마 소개되었다. 마지막 항목에서 좀 더 집약적으로 의견을 개진할 생각이다.

필자는 앞서 종교간 대화 운동이 실천이 중요하되 그 이상이 될 것을 주문했다. 종교간 대화운동의 목적을 좀 더 근본적인 곳에 두고 싶어서이다.

주지하듯 오늘의 시대를 두 번째 차축시대 혹은 영성의 시대라 한다. 이를 함께 말하면 첫 번째 차축시대를 거치면서 제 형태로 분화되었던 종교들이 영성이란 이름하에 점차 한 곳으로 수렴되는 시점이란 것이다.

최근 신과학 사조 역시도 이런 흐름에 일조하는 추세이다. 종교 없는 영성은 가능하되 영성 없는 종교는 퇴출될 것이란 말도 회자된다. 이점에서 필자는 多夕 유영모가 말한 귀일(歸一)사상에 주목한다.

일명 이것은 한국적 통섭(通涉)론이라 불려 지기도 한다. 이는 유물론적 환원주의를 표방한 윌슨식 統攝과 구별되는 것으로 영성이 중심이 되는 후천(後天)시대의 종교양식을 적시한다.

후자의 통섭이 하나에로 모든 것을 환원시키는 제국주의적 개념이라면 처음 통섭은 오히려 그를 배격한다. 즉 統攝이 큰 상자 속에 작은 상자가 겹겹으로 싸여지는 상태라면 通涉은 오히려 소금이 물에 녹아 소금물이 되어 둘의 구별이 사라진 모습을 보이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多夕의 歸一사상이 어찌하여 通涉이 될 수 있다는 것인가? 多夕에게는 모든 종교는 결국 하나로 돌아간다는 확신이 있었다. “전체인 하나는 개체의 하나가 나오기 전에 나온 것입니다.

모든 개체는 하나에서 나오고 전체인 하나에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이것은 서구의 신(실재)중심주의와 전혀 다르다. 오히려 多夕의 귀일사상은 한국 고유한 삼재(三才)론에 터한 것으로 우주 생성의 근원인 하나가 ‘참나’와 다르지 않기에 나를 찾는 것이 하나로 돌아가는(歸一)것인 까닭이다.

소위 <천부경> 하경의 핵심인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이란 말이 그것을 말한다. 따라서 多夕은 이런 큰 하나(元一)를 놀랍게도 인간의 밑둥(바탈)이라 했고 만물 속의 신(神)이라고도 말 할 수 있었다.

이처럼 불측(不測)의 큰 하나와 바탈이 같은 것이기에 유불선을 막론하고 인간정신을 큰 하나로 고동(鼓動)시키는 것-빈탕한데 맞혀놀이-을 종교의 할 일이라 여겼다.
 
달리 말하면 바탈의 완성을 통해 천지화육을 돕는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종교간 회통원리였던 것이다. 이점에서 多夕의 귀일사상은 포함삼교(包含三敎)로서 접화군생(接化群生)하는 현묘한 도(道) 그 자체와 같다.
 
유불선(儒彿仙)은 물론 기독교 속에도 녹아들어 각기 자신들의 방식으로 인간과 사물 일체를 살려내는 일을 하는 道(元一 혹은 온통)였기에 그것이 通涉일 수 있었던 것이다.

저마다의 종교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인간 정신을 빈탕에 맞혀 놀도록 부르는 그 소리에 우리는 응답할 수 있고 그 때 비로소 우리는 후천시대의 영성적 삶을 살 수 낼 수 있는 것이다. 종교간 대화운동의 목적을 歸一에 두는 것을 한국 종교인들의 과제로 여길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다.

회통정신에 투철한 불교, 조상숭배만이 아니라 본래 무극(無極)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유교 역시도 이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일본까지도 품어 않으며 평화적으로 민족 독립을 원했던 3.1 독립선언서의 정신을 귀일 사상의 시각에서 풀어내 봄 직도 하다고 생각한다.

2013년 가을이 되면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이 땅을 방문할 예정이다. 한국 서울에 세계 최대의 교회가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기독교 종주국 된 것을 자랑하기 보다는 다양한 종교들이 공존하며 하나로 돌아가는 두 번째 차축시대가 실험되고 있음을 만천하에 들어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에 앞서 7대 종단은 현실적으로 接化群生을 향한 열망을 키워나가야 한다. 2012년은 성장을 멈추는 첫해로 기억될 것이란 경제학자의 말이 있을 정도로 어려운 시점이 될 것이다.

정의의 열풍이 금년 일 년 간 한국 사회에 불었던 것도 되씹어 볼 일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자가 인구 대비 일본의 4배 이상 팔렸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간과할 수 없다.

성장이 멈추는 시점에서 갈등과 분쟁이 많아 질 것이고 그럴수록 나눔의 가치가 커질 터인데 과연 종교는 접화군생의 힘을 표출하고 그 가치를 실현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기회 있을 때마다 필자가 거듭 강조하듯 OECD 국가들 중에서 욕망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가 되어 있는 현실에서 종교가 과연 무엇을 했는지 되물을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닌 까닭이다.

나눔은 단순성이 최고의 가치가 될 때 실현가능해 진다. 접화군생의 힘을 갖기 위해서라도 종교는 지금보다 한없이 단순해져야한다.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자신의 속옷 까지 내주어야 할 현실에서 축적한 종교적 부를 내 놓아야 마땅하다.

중생이 아프면 부처도 아프다는 말이 있고 지금 배고픈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이 있다면 그것을 그대로 살아내야 한다. 다행히도 6자회담이 재개되는 현실에서 크게는 통일을 위해, 작게는 북한 주민의 배고픔을 위해 7대 종교들이 한마음이 될 수 있다면 그것처럼 아름다운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정부 돈 가지고 북한을 방문하는 정도 가지고 만족한다면 큰 오산이다. 종교인조차 생색내는 일로 만족한다면 통일 후 그들에게 道를 전할 면목을 잃을 것이다. 최선이 타락하면 차선이 되지 않고 최악이 된다는 이반 일리치 신부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익히 알 듯 강도만난 이웃의 곁을 제사장과 레위인(율법학자)이 지나갔다. 예배를 위해서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했겠으나 그들은 神이 인간이 되었던 최선의 사건을 최악으로 만든 존재들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정작 유대인과 적대 관계에 있었던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유대인을 끝까지 돌봐 주었다.

물론 그 역시 자신의 관습, 민족적 차원의 분노에 의거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 하지 않았다. 성서는 그처럼 사는 것, 선한 이웃이 되는 것(接化群生)을 영생이라 하였다.

인간이 만든 일체의 장벽을 허무는 것, 그것이 제도이건, 인습이건 법률이건 간에 그것을 넘어 강도만난 이웃을 돕는 접화군생의 삶은 종교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종교간 대화 운동의 실천은 이런 모험을 통해 가능하다. 모든 것을 팔고 일체 제약을 넘어서 이 일을 감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필자는 지난 2년 가까운 세월 동안 KCRP 종교간 대화 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다. 그간 여러 곳에서 종교간 대화 경험이 있었기에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리하지 못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한국 종교인 평화회의가 해야 할 으뜸 과제는 종교간 대화 담론을 만들어 내는 일이라 보았다. 하지만 본회는 일종의 사업단체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7대 종단이 모여 종교인 신분으로 함께 사업을 하는 것은 대단히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종교간 대화의 이론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실험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간 이점이 대단히 소홀했다. 종교연합 기구로서 KCRP는 개별 종교가 역량 상 할 수 없는 이론적 차원을 맘껏 연구하는 분위기를 조성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간 종교간 대화 위원회의 인적자원은 정부와 관계된 행사에 강의하는 일로 분주했다. 함께 모여 대화하고 한국적 토양에서 그 이론을 축적해 가는 일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 한 이유일 것이다.

필자는 속한 위원회 안에서 올 한 해 동안 <축(軸)의 시대>를 함께 읽고 종교간 대화 방향을 정립하고자 했었다. 실행위원들도 참여토록 독려했으나 지속되지 못했다.

종교간 대화를 지속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듯 보였다. 실무차원에서 이것이 공허한 탁상공론에 머문다는 판단이 때론 앞섰던 것 같다. 위원들 대다수가 너무 오랫동안 본회에 속해 있다 보니 타성이 생긴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좀 더 열성을 지닌 최고의 학자들이 모여 한국 종교인 평화회의에 정신적 근거를 제공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를 위해 본회는 종교간 대화를 시도하는 여러 단체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다.

주변을 보면 적지 않은 곳에서 종교인들 간의 치열한 만남의 장이 이뤄지고 있다. 외형상 화려한 종교연합기구들만 주목될 이유가 없다. 종교담당 언론 기자들의 종교탐방 기사도 주목할 것이 많다.

이들의 경험을 수혈하여 할 바를 재고하고 방향을 수정하여 큰 의미를 창출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만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종교인 평화회의는 2019년 3.1 독립선언 100주년을 준비하며 최소한 지역마다 33인 종교인들 모임을 결성시키는 일을 착수했으면 한다. 이를 위해 종교연합기구들과의 실질적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빈곤, 환경, 복지, 통일 등의 문제해결을 위해 지역별로 33인의 종교인 대표 모임을 조직하여 관리하고 도움을 주는 구조로 재편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종교간 대화 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대화문화 아카데미가 구체적 활동을 시작할 계획이다. 함께 이 일을 성사시킬 책임이 KCRP에 있다고 생각한다.
 
본 사안은 언론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문광부와도 교감할 수 있는 주제이기에 대대적으로 계획해 볼만하다.

끝으로 이 일에 종사하는 실무자들에게 봉사와 헌신을 요구하는 만큼 실질적인 합당한 대우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는 일이 귀한 만큼 자신감 넘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KCRP에게 남겨진 과제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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