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뉴스-문화]나는 여전히 아홉 살이었다. 산에서 길을 잃고 남자의 도움으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지 몇 달이 흘렀는데도 아홉 살이었다. 할머니는 그 일이 있은 뒤로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어르고 달래고 문둥이에게 잡혀간다는 협박까지 해서 울안에 가두어버렸다.

“넌 재선이의 씨톨이제. 세상에 단 하나 뿐인 꽃다지란 말이구먼.”
“꽃다지가 뭔데?”
“열매의 첫 물여. 무녀리 여. 재선이의 흔적이라고는 너밖에 없제. 지발, 꿈쩍 말고 집에만 있어라. 자식 버리고 도망간 어미는 찾아서 뭣 하려고 그러는 겨. 재 너머 고추밭에 갔다 올 테니, 집에서 놀고 있그라.”
할머니는 산 속에서 만난 그 남자를 몹시 두려워했다. 귀가 따갑도록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말라고 타일렀다.
안동 사진관 사장인 작은 아버지보다 그 남자를 더 두려워하고 있는 듯 했다. 집까지 데려다 준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산에서 해를 입히지 않았느냐며 꼬치꼬치 캐묻기까지 했다. 산 속에서 지낸 일을 아주 자세히 말하려다 그만 두었다. 그랬다가는 할머니가 학교까지 따라가겠다고 할 태세였다.

“쿵!”
처마 위에서 대롱거리던 흙이 마루 위에 뚝 떨어졌다. 반질거리던 마루 위에 누런 황토 흙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제 그런 일로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일 따위는 없었다. 워낙 오래된 집이라 어쩌다 한 번씩 밤송이만한 흙이 떨어졌던 것이다. 기와가 내려앉는 통에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천정에서 비가 줄줄 샜다. 남자라고는 중학교에 다니는 자명뿐이었다. 더군다나 자명은 사진관에 들러 늦도록 일을 하고 돌아오기 때문에 집안을 돌본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검은색 치마가 뒤집혔다. 할머니가 아끼느라고 입어보지도 못한 채 장롱 속에 얌전히 모셔두었던 공단치마였다. 끝내 유행이 지나 나의 몽당치마가 되어버린 것이다. 벽에 기대고 얼마동안 앉아 있었다. 고개 너머 고추밭에 간 할머니는 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자명의 자전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후끈하게 달아오른 좁은 마당엔 햇살이 하얗게 부서졌다.
“엄마!”
작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소리였다. 금세 눈가에 매달려 있던 눈물방울이 주르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산에서 남자를 만나고 난 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더 깊어졌다.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어머니의 젖가슴을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 가득 그려 넣었다. 문지방에 엎드려 엉엉 울기 시작했다. 매미의 울음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내 울음소리만 집안 가득했다. 눈물은 그칠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 얼마동안이나 지났을까. 울다 지친 나는 마룻바닥에 엎드려 잠들고 말았다.

“아이고, 야야! 여기서 이렇게 자고 있으면 어떻게 하냐. 집은 웬 날벼락이야. 마루에 흙덩이 좀 봐라.”
할머니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 왔지만 쉽게 잠을 털어낼 수 없었다. 꽤 잠을 잤던 모양이었다. 두 볼에 흘러내린 눈물이 뻣뻣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해인이 울었지? 또 어미 생각했제?”
“아니야. 자명이가 안 와서 울었어.”
“자명이가 뭐냐. 오빠라고 해야지. 중학교에 다니는데, 이젠 오빠라고 불러.”
“아! 저기 온다.”
자명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이마에는 땀으로 흥건했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자명아, 왜 이제 와. 얼마나 기다렸는데…….”
“요게, 또 자명이라고 하네.”
“사장님이 앨범 만드는 일을 심부름 시켜서 늦었어. 참, 할머니! 저녁에 사장님이 이곳에 오신데요. 의논할 일이 있으시데요.”
“무슨 의논이야. 다 끝난 일인데. 어쩌자는 심사인지 모르겠구먼.”
사진관 식구들과의 왕래가 점점 뜸해지던 무렵이었다. 사진관에서 일을 돕고 있던 자명이 소식을 알려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집은 늘 조용했다. 고요한 집, 그런데 할머니는 작은 바람소리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일정도로 귀를 열어두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혹 마을 어귀를 서성거리다가 돌아섰을지도 모르는 어머니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렸던 것일 수도 있었다. 어머니가 갈전마을을 떠나기 전까지, 할머니의 귀는 하루도 빠짐없이 대문 밖의 바람소리를 차곡차곡 접고 있었던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나 또한 귀를 여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새끼손가락 크기 정도의 뚫린 문구멍 사이로 귀를 열어두면 감나무 잎이 떠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하지만 마당 한가운데 달빛과 별빛만 가득할 뿐, 어머니의 모습은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어렴풋하게나마 집안이 어수선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살고 있던 집 문제였다. 그 무렵, 작은 아버지는 사진관 확장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사진관 건물을 5층으로 올려 예식장을 넓히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의 집을 처분하고 살림집을 한 곳으로 합치자고 했다. 처음에는 할머니도 완강히 거부했다. 작은 아버지의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집안 살림을 맡아서 하고, 어린 사촌 동생을 내가 돌보면 도움이 될 거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다, 내 업보제. 천금 같은 내 새끼 먼저 떠나보내고. 메느리 내쫓고, 그것도 모자라 이제 집까지 내놓게 생겼으니 말이여. 사람도 야녀. 고것들은……. 뭔 욕심이 그렇게 많을까. 알고 보면 사진관도 모두 네 몫이여. 다 지나간 일이지만 어린 널 델뿔고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말여. 모두 죽은 아범이 일구어 놓은 재산들이제. 아이고, 요년의 주둥아리! 어린 아를 앉혀 놓고 별 소리를 다 하는구먼.”
한숨 섞인 푸념은 그게 처음이 아니었지만, 그날따라 할머니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위태로움이랄까, 모든 것을 포기한 얼굴이었다.

서울에서 사진 기술을 배운 아버지가 안동으로 내려온 것은 70년대 초반이었다. 그해 읍내에다가 가게를 얻어 사진관과 예식장을 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손수레를 이용해 사진을 찍는 이동식 사진관이 대부분이었다. 여유 있는 집안에서는 떠돌이 환쟁이들에게 영정사진을 그리거나, 인근 도시로 나가 사진을 찍었을 정도였다. 아버지의 사진관과 예식장은 손님들로 붐볐다. 전통혼례를 고집하던 사람들도 아버지의 사진 기술과 화려한 조명에 이끌려 마음을 열었던 것이다.

그 무렵, 젊은 남자들은 이라크,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의 건설 현장으로 돈을 벌기위해 떠났다. 그래서 가족사진을 많이 찍었다. 자명의 아버지도 이라크 건설현장에서 일을 했다. 아버지와는 어려서부터 워낙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자명의 가족을 돌봐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명이 카메라를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밤이 깊어지자, 사진관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가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니, 저희 왔어요. 너무 덥군요. 여기 갈전마을은 산 밑이라서 좀 시원할 것 같았는데 읍내와 다를 바가 없어요.”
작은 아버지는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쉰 목소리로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작은 아버지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집안을 흘깃 흘겨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소름이 돋는 무서운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할머니는 설거지를 끝내지도 못하고 작은 아버지의 채근에 떠밀려 밖으로 나왔다. 모두 대청마루에 둘러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반쯤 돌아앉아 있었다.
“어머니! 생각을 좀 했는겨?
“뭔 생각을 혀? 처음부터 이야기 했지 않았냐. 자명이와 해인이하고 이렇게 살란다. 너희가 주는 생활비는 고맙게 생각 하제. 따지고 보면 모두 재선이 갸가 기반을 잡아놓아서 일어선 것 아니냐? 그 공은 절대루 잊으면 안 되는 법이제.”
“그러니까, 제가 어머니와 해인이 데리고 가려는 것이지요. 물론 자명이도 함께 가요. 저만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어머니가 염려하는 그런 일은 없어요. 해인이는 제 딸입니다. 친 자식과 다름없어요.”
할머니는 한동안 말문을 열지 않았다. 동네 개 짖는 소리만 간간히 들려 올 뿐이었다. 자명은 마당에 모깃불을 피우고 있었고, 나는 감나무 주위를 빙빙 돌며 대청마루에 감돌고 있는 무거운 침묵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할머니의 긴 한숨이 들려왔다. 작은 아버지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내가 죽을 날이 더 가깝지 살아갈 날이 많겠냐. 저 어린 해인이 걱정에 통 잠이 안 온다. 그러고 자명이 쟈는 재선이가 살아 있음 우리 집 호적에 오를 아이제. 어찌되든 간에 한 가족이라고 생각 혀야제. 나도 이젠 몸이 예전 같지 않구먼. 언젠가는 너희들 내외가 해인이와 자명이를 돌봐줘야 할 것이고……. 그럼 아범 뜻대로 하는 것으로 매듭짓도록 혀자.”
할머니는 꽉 쥐고 있던 두 손을 풀었다. 오랜 망설임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할머니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당신 자신의 힘으로는 자명과 나를 학교에 보내기 힘들었을 테니깐 말이다.
대청마루에 흙덩이가 쿵하고 떨어지고, 비가 오면 지붕에서 비가 줄줄 새던 그 집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어차피 갈전마을에 중학교가 없어서 몇 년 후에는 안동 읍내로 옮겨가야 했다. 할머니는 잘 된 일이라고 하면서도 가슴을 쳤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토록 할머니가 그 집에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를 말이다. 그곳은 할머니가 아버지를 낳았던 곳이고, 어머니가 나를 낳았던 곳이었다. 그곳은 피로 얼룩진 큰아들의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하던 집이었으며, 어린 핏덩이와 며느리를 매몰차게 갈라놓았던 집이기도 했다. 갈라진 벽 틈마다 상흔의 흔적이 남아 있는 그 집을 떠난다는 것은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해인이 자냐?”
“아니…….”
“내 새끼, 요것 불쌍혀서 죽지도 못하것다. 아무래도 할미가 오래 살지는 못할 겨. 안동 읍내에 가서 살믄 그저 자명이와 손 놓지 말고 살어. 그 눔은 널 지켜 줄 겨. 작은 애비가 그래도 너희들을 내치기야 하것냐. 하지만 그들이 어떤 위인이냐. 결국 네 어미를 억지로 내쫓아내고 애비의 재산을 가로챘지 뭐냐. 어린 너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혹 기죽지 말고 살라고 하는 야그다. 사진관 일부는 네 몫이니까. 애비의 유언도 있었으니까, 자명이와 해인이 만큼은 나 몰라라 하지는 않을 게다.”
새벽이 올 때까지도 할머니의 잔기침 소리는 계속되었다.

 <이경 장편소설 『 탈 』는 불교공뉴스 창간기념 작품으로 2012년 봄날 출간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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