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뉴스-문화]잘려나간 속세의 무거운 짐이 화선지 위에 수북이 쌓였다.
살아보겠다고 속세에서 발버둥친 죄. 그 가운데 지은 죄를 용서 받기위해 눈을 꼭 감고 머리카락이 하나도 남김없이 잘려나가길 기다렸다. 머리에 비누질을 하더니 날카로운 면도날이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 전해졌다. 염려했던 것과 달리 몹시 홀가분했다.
“오늘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부처님의 불제자가 이원 대성사에서 나온 날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자신의 번뇌를 위해 108배를 올리도록 하십시오. 눈, 귀, 코, 혀, 몸, 생각을 일컬어 6근(六根)이라하고, 색, 성, 향, 미, 촉, 법을 6진(六塵)이라하는데, 이들이 서로 상호작용하여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의 번뇌가 합해져 108번뇌란 숫자가 됩니다.
번뇌는 집착에서 옵니다. 자신과 타인에게 집착하고, 소유물에 집착하고, 덧없는 것들을 영원한 것처럼 여기는 것에 집착하였기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이제부터 스님 수계를 받는 동안까지 하루에 몇 번이고 108배를 해서 번뇌에서 하루 속히 빠져나오길 빌겠습니다. 그 외의 신도님들도 행자님이 수행 길에 올라 무사히 계를 받을 수 있도록 동참기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범문을 하신 스님의 말씀대로 양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속세의 무거운 짐은 스스로가 만든 번뇌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처님께 일 배를 하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집착에서 오는 번뇌였다. 인연이라 생각했는데, 그 인연을 떠나보내야 했던, 그 오랜 아픔을 가장 먼저 털어냈다. 그것도 집착이요, 욕심이었던 것이다.
점점, 명치끝이 아파왔다. 부처님께 이 배를 올리고, 세상을 원망했던 속세의 시간을 지워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 안이 몹시 기울어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고등학교를 겨우 마칠 수 있었던 아련한 아픔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 밀려나왔다. 세상을 탓했던 원망의 번뇌가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삼배를 하고 사배를 하고, 그리고 백배의 절을 하는 동안 머릿속에 떠오르는 무수히 많은 장면들을 하나씩 잘라내고, 털어냈다.
‘아, 저 멀리에서 아이스크림 통이 나뒹굴고 있구나. 열심히 한 번 살아보겠다는 욕심이었는데,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어느 중학교 소풍날, 아이스크림 통을 오토바이에 싣고 학교 행렬을 따라 갔던 적이 있었지. 하필 내가 다녔던 중학교 담임선생님과 정면으로 부딪혔고, 겸연쩍어 하면서도 오토바이에서 내려 공손히 인사를 드렸었지. 애들아, 저 불량식품은 사먹지 마라! 화를 버럭 내는 담임선생님! 그리고는 아이스크림 통을 손으로 확 밀쳐버렸지. 아이스크림 통은 순식간에 나뒹굴더니 안에 있던 내용물이 이리저리 쏟아졌지. 너무나 화가 났었지. 그리고 그 담임선생님을 증오하는 마음으로 이를 갈며 살아갔지. 아무리 못돼 먹은 사람들을 만나도 그 담임만 할까 싶어 이를 악물고 참아냈지.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난 담임선생님의 속내를 알아차렸지. 넌 그런 일하며 살아갈 인물이 아니야. 넌 얼마든지 더 훌륭한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그릇이란 말이야. 아, 선생님 그런 뜻이었군요. 그 속 깊은 마음을 몰랐습니다. 그 후, 선생님이 돌연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나 놀랐는지,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내 안에 캄캄한 감옥을 짓고 나를 가두어 두었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그 캄캄한 마음의 감옥을 차츰 허물어냈다.

<혜철스님 자전 에세이 『하늘나비』는 2012년 봄날 출간예정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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