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뉴스-옥천] 저물어가는 12월의 끝자락에는 많은 회한과 아쉬움이 늘 상존하기 마련이다. 해가 바뀌는 이때가 되면 누구나 회한과 연민은 남는다. 순탄한 인생이 아닌, 서럽고 힘든 아픈 인생일수록 더 강하게 그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한 팔이 없어 장애2급 판정을 받았음에도, 꽃다운 나이 23살에 중매로 보은군 마로면으로 시집을 갔다. 옥천군 동이면 금암리가 고향인 송명자(64·장애2급) 할머니는 31년 전, 청천벽력으로 남편을 잃었다. 인생의 단맛, 쓴맛을 맛보며 살아온 한 사람의 애처로운 사연을 통해 더 아픈 사람들이 밝아오는 정유년 새해에 들려주는 희망의 메시지가 되었으면 행복하겠다는 할머니의 인생이야기를 들어봤다. 〈편집자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6명의 손자손녀 생겨
“난 이보다 더 이상 열심히 살수 없을 것 같아유.” 절규했던 그날이 바로 엊그제 같다.
2016년 병신년 한해가 저물어가는 이 길목에서, 그날의 고통은 저 만치 물러서있고, 힘들기만 했던 절벽만큼이나 위태로웠던 세 자녀들이 풍파 속에서도 잘 자라줘 그는 어느덧 6명의 손자손녀를 품에 안은 행복한 할머니가 되어 있다.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남편 잃어
“정말 살길이 막막했어요. 당장 아이들과 뭐해 먹고 살지가 걱정이었어요. 막내가 4살 때인 31년 전 그날, 농사만으로 살기가 어려웠던 시절, 일일노동자로 보은군 마로면 탄광지대에서 막일을 시작했던 남편이 10일 째 되던 날 길가에서 난데없는 교통사고를 당했지요. 그 소식을 듣고 하늘이 캄캄해지고 하늘이 내려앉는 슬픔이 밀려왔어요. 어찌 살아야 될까 막막하더군요.”
송씨 할머니는 “하필이면 교통사고를 낸 사람이 천애의 고아에다 돈도 없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궁여지책 끝에 당시 3천만 원의 보상금을 손에 쥐고 아이들 셋을 이끌고 거친 삶 속에 내동댕이쳐졌지”라며 혀를 끌끌 찼다.

노점상 시작으로 새로운 인생의 활로 찾아
“벌써 노점상을 해 온지 26년이 되었어. 처음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노상에서 물건을 펴놓고 콩나물, 두부, 청국장을 직접 기르고 만들고 해서 팔았지. 돈 되는 것이라면 다했어. 해뜨기 전인 새벽에 길가에 나가 밤이 이슥해져야 집에 들어갔어. 애들을 돌볼 시간도 없었지만 아이들은 그래도 잘 자라주었어. 그것이 신기하지.”
송씨 할머니는 “처음에는 리어카도 없이 머리에 이고지고 팔러 다녔어. 그러다가 한 참후에 리어카를 사서 콩나물이며 각종 나물이며 청국장, 두부 등을 팔았다”며 “겨울에는 얼굴이 꽁꽁 얼어 발갛게 동상이 들었고 두부며 콩나물은 뻣뻣이 얼어붙을까 이불을 덮어 씌워가며 장사를 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청국장·두부 만들 때가 지금도 가장 행복해
“솔직히 그래도 장사는 지금보다 그때가 좋았어. 잘 될 때는 하루에 5만원씩은 벌었던 것 같애. 그러니 아이들 셋을 빚 안지고 길렀지. 월사금도 밀린 적 없어. 그러나 너무 힘들었던 것은 거친 생활 속에서 왼팔이 없어 고생을 더 한 거지. 한 팔로 모든 것을 다 했어. 콩을 삶아 불을 때서 청국장을 쑤어 팔았고 거기다가 콩나물까지 길러 팔았어. 절대로 남들이 기른 콩나물은 받아다 팔지 않았어. 그게 내 인생의 철칙이었어.”
송씨 할머니의 파란만장한 인생이야기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가 언덕길을 내려갈 때처럼 연신 끊이질 않고 흘러나왔다.

한 팔로 장사·육아·생활 등 해결한 ‘원더우먼’
“한 팔로 아이들을 키우고 장사를 위해 준비를 하고 인생이 무슨 인생인지 난 알지 못했지. 그래서 너무 화가 나 어떨 때는 소리소리 지르며 난 이보다 더 이상 열심히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하고 외쳐대기도 했어. 하늘이라도 알아달라고.”
한 팔이 없어 장애2급을 가진 송씨 할머니는 14세 때 친구를 따라 방앗간에 놀러가서 피댓줄에 팔이 말려 들어가 어린 나이에 그 귀한 팔을 잃었다.

14살 때 방앗간에 놀러가 한 팔 잃는 사고 당해
“순간이었어요. 친구와 장난을 하다 그만 빠르게 돌아가는 피댓줄에 팔이 감겨 이 지경이 됐어요. 그래도 인생이 살아지더라구요. 그래도 악착같이 살았어요. 친정집이 가난해 도움이 되지를 못했어요. 겨우 동이초등학교만을 졸업해 까막눈은 면했어요. 한글은 읽고 쓸 줄은 아니니까 먹고 살았지, 불행 중 다행이었지.”
송씨 할머니는 “그래도 지금이 훨씬 행복해유. 예전에는 비바람 눈보라를 피할 곳이 없어 그냥 맞거나 우산을 쓰고 살았다”며 “이곳 옥천공설시장에서 장사를 해온지는 꼭 6년으로 지금은 아주 편해요. 감사하지요. 앉아서 눈·비를 장사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고마운 줄은 고생을 안 해 본 사람은 모른다”고 말했다.

한국 사람에게 가장 인기 식품은 역시 ‘청국장’
“그러고 보니 별별 것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봤지요. 영동 양산으로 시집간 언니네 집에 무 농사를 많이 지었지. 차를 빌려 무청 시레기를 한차 싣고 와 집에 줄을 매달아 놓고 시레기를 묶어 말렸지. 장관이었지. 그렇게 말린 시레기를 삶아 시장에서 팔았지요.”
송씨 할머니는 또, “내 이야기를 하려면 밤새도록 이야기해도 끝이 없어요. 아이들과 살기 위해 있는 짓 없는 짓 해가며 살았지요. 옥천공설시장에서 내가 파는 것은 주요 품목이 두부, 청국장, 잡곡 등인데 특별한 것은 내가 아무리 피곤해도 청국장은 직접 만들어 판다는 게지. 콩을 사서 삶아 짓찧어 방안에서 띄우고 맛을 낸 청국장은 지역민들에게는 인기가 있어. 손님이 많이 찾아와주시지요. 무척 고맙지요. 큰 한 덩어리가 1만원 받는데 요즘 콩 값이 펄쩍 뛰어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은인인 옥천공설시장 활성화가 나의 새해 소망
“물가가 올라도 너무 오르니까 오히려 공설시장을 찾는 손님들이 늘어나는 것 아니냐”며 미소 짓는 송씨 할머니는 “내년 정유년에는 더욱 경기가 어려워진다고 하니까 걱정이 돼. 내 이름으로 집칸이라도 있으니까 나라에서 지원하는 것이 많지는 않아요. 그래도 아이들 셋이 다 자립을 해서 살고 있으니 내게는 그게 행복이지요.”
송씨 할머니는 “청국장요? 두말 쑤면 석장 나와요. 내가 만드는 청국장은 크기가 커서 한 장이면 거의 한말은 안돼도 크지. 낱장으로는 한 장에 5만원 받어. 비싸지는 않지. 콩 값이 비싸서 그러지. 청국장을 띄울 때 방을 만들어 놨어.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니 한국의 맛은 곰삭은 맛으로 냄새는 고약한데 맛은 기막히지. 이 맛을 못 잊어 어떤 손님은 외국에 갈 떼도 이것을 사가지고 간다니까. 그럴 때는 한 장을 더 올려 주었을 때도 있었지. 마음이 고마워서 그래.”라며 농을 던지신다.

생애 처음 장애인단체서 받은 수상 ‘못 잊어’
또, 송씨 할머니는 “상 같은 것은 딱 2번 정도 받아 보았어. 무슨 장애인 단체에서라나. 어딘지는 알 수 없어. 열심히 인생을 살았다고 상을 주더라고. 그것을 보고 애들이 좋아했어. 그것을 표 삼아 아이들이 공부를 잘 했는지는 모르지만 공부들을 잘하더라구. 속을 썩여 본적은 없으니까. 아마 1, 2등을 다투는 적도 있었을 거야. 나 학교 다닐 때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간신히 까막눈만 면했어. 그때 소원은 늘 돈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거였다”고 말했다.

항상 친절 넘치는 공설시장 이웃사랑 ‘행복해’
그리고 송씨 할머니는 “공설시장 가족들이 나에게 참 잘해줘요. 내가 몸이 안 좋아 늦게 나오기라도 하면 먼저 포장을 걷어주고 덮어주는 등 이웃들 사랑이 보통은 아니지요. 공설시장 김재수 총무님도 노점 상인들을 위해 군에 부탁해 많은 일을 해주시니까 항상 고맙고 고맙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나의 인생에서 빛이자 유일한 희망
“남편을 생각하면 아득하지만 늘 잘해주었던 생각만 가득해. 아이들도 잘 봐주고 기저귀도 개어주고 돌봐주고 착하신 양반이었어요.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되었네요. 허망히 남편을 떠나보내고 난 뒤 나의 인생은 아이들이 빛이고 아이들이 희망이 되었어요. 그런 바람대로 하나도 쳐지지 않고 사회를 위해 이바지 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어 지금은 너무 행복합니다.”

간절한 새해 소망은 모두가 건강하고 잘되는 것
2016년 저물어가는 한해를 아쉬워하기보다 밝아오는 새해에 희망을 걸어보는 송씨 할머니의 새해 소망은 자식들이 모두 다 건강하게 행복하게 잘 살아주고, 시장사람들 모두가 장사 잘되고, 옥천공설시장이 잘 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이 전부였다.

이 기사는 옥천향수신문과 불교공뉴스가 공동 취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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