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뉴스-문화]  변명
발광하던 장마가 꿇어앉은 날,
궤짝으로 배달된 사과를 먹었습니다.

제대로 햇살 한번 받지 못한 탓일까, 귀퉁이 무른 사과를 도려내며 속살 반, 허물 반인 삶이 껍질째 쟁반 위로 널브러져 또 다른 낯선 부활이 시작되었다. 여태 신성한 것이라 믿었던 부활.

다시는 돌아올 수도 없게
먼 곳으로
어머니, 당신을 두고 온 이후
당신이 남긴 오만 것을 만지작거리다
여름을 무더기로 보낸 비가 옵니다

마침표
꽃상여 뒤를 따르며 찬송했습니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고
검은소변을 쏟아낸다는 병세를 들었을 때도
삼칠일 요양병원에 누워
가까스로 의식을 불러
내 이름을 부르실 때도
새벽녘 언니에게 부음을 들었을 때도
당신의 부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등신이 되었습니다.
어머니 계신 산소 길밖에 모르는
아버지는,
노인학교에서 간식으로 준 박하사탕 두 개
호주머니에서 꺼내 산소 앞에 올려놓고는
“내가 왔다 간 지 알라나?”
물으십니다

이제사,
당신의 마침표가 보입니다.

마중물

이제 신화리 100번지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난 어머니
풀 한포기 허락지 않던
아버지 마당에는
계절 따라 번갈아 맺고 지는
감나무밤나무석류나무은행나무대추나무향나무만
주인인 양
제자리에 꿈쩍 않고 서 있다

우리 따로 객지를 떠돌다
바싹 마른 속내
번번이 삐걱거려도
육남매 불려 놓은 식솔들까지
가끔씩 둘러앉아
배곯던 기억조차

추억하라던 말씀,
마중물*로 부어져
빈집 가득
시간의 틈새를 적신다

* 마중물 : 펌프에서 물이 잘 나오지 아니할 때 물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위에서 붓는 물.

들깨 걷이

엄마를 보내느라
때늦은 들깨 타작을 했다.
그 중 반은 땅으로 떨어져
제철 모르고 싹이 나고
그 중 반은 털어 집으로 가져왔다

키 엉덩이를 치며 까부를 때마다
터럭은 앞으로 쏠려 떨어지고
알곡은 안으로 차곡이 몰려들었지
당신이 하던 모습 시늉하며
키에 서너 주먹씩 넣어 까부르기를 했다

아무리 흔들어 치며 까불러봐도
알곡과 쭉정이가 뒤엉켜드는 건 왜일까
아직 당신이 남긴 가을은 지천인데
세상 이치, 가르는 법

다 배우지 못한 타작마당 한 가운데
쭉정이 한 움큼.

 

<약력>
이영옥 시인은 1968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하였다. 1988년 오늘의문학으로 작품활동을 시작, 1993년《해동문학》으로 등단, 제6회 대전예술신인상, 제22회 대전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집 『날마다 날고 싶다』 『아직도 부르고 싶은 이름』 『당신의 등이 보인다』 『가끔 불법주차를 하고 싶다』 『길눈』 등이 있으며, 2015년 대전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금을 수혜 받아 여섯 번째 시집 『알사탕』을 상재하였다. 한국문인협회, 문학사랑협의회, 대전문인협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문학잡지《문학사랑》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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