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롱오로롱 물레야

[불교공뉴스-문화] 오로롱오로롱 물레야

해인은 두 개의 주지탈을 뺀 열두 개의 탈을 바위에 기대 놓았다. 입가에 커다란 원을 그리며 웃고 있는 양반탈과 선비탈의 웃음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중탈과 백정탈은 고뇌에 가득한 웃음을 토해내고 있었으며, 각시와 부네도 제각기 다른 표정을 지었다. 떡다리탈, 별채탈은 입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오랫동안 소외당한 상처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탈 속에 남아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탈은 마지막으로 깎은 총각탈이었다. 해인의 아버지 얼굴이었을 수도 있는 총각탈이었던 것이다. 동굴 안은 열두 개의 탈 웃음소리가 멈추지 않고 들려왔다.

오로롱오로롱 물레야
오로롱오로롱 물레야
오로롱오로롱 물레야
돌고돌고 돌아라
우리 할머니 노리개
돌고돌고 돌아라
얼그렁절그렁 베 짜는 소리
우리 네 탈 웃음소리
헛헛헛, 하하하, 헤헤헤, 후하하, 호호호.

물레 도는 소리인지, 베 짜는 소리인지, 물레방아 도는 소리인지, 명 타는 소리인지.........
‘하하, 호호, 훗훗, 히히, 키득키득.........’
동굴 안은 탈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그 웃음소리에 그만 얼이 나갈 지경이었다. 해인은 열두 개의 탈을 모두 완성했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동굴 입구가 밝아오고 있었다. 하늘은 청 보랏빛으로 변하더니 금세 붉게 타올랐다. 해인은 눅눅한 침낭 속으로 들어가 몸을 뉘였다. 눈을 감자 눈동자가 쓰라렸다. 온몸이 물 아래로 푹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때 목구멍에서 울컥 하며 뭔가가 치밀어 올라왔다. 연속적으로 구토증이 일어났다. 속이 텅 비어 있었다. 체중이 몹시 줄어든 것 같기도 했다. 입고 있던 옷이 헐렁했다. 동굴에서 먹는 음식이 부실한 탓이었다. 그렇게 눈꺼풀 위로 내려앉은 옅은 잠에 얼마동안 빠져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머릿속이 점점 어지러웠다. 지난 일들이 비상등처럼 깜박거리며 되살아났다 사라졌다. 이제 그만, 그만 생각하고 싶었다.
이갑수가 또 다시 뇌출혈로 쓰러져 꼼짝 못하자, 곧바로 사진관은 김 사장에게 넘어갔고, 가지고 있던 부동산마저도 경매에 붙여진 상태였다. 왜 그런 소식이 해인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것인지 화가 났다. 모르고 살면 그만인데. 그 사실을 알면 그녀가 춤이라도 덩실덩실 출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누군가가 알려줬던 것이다. 해인은 작은 아버지 이갑수에 대한 그 어떤 소식도 듣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그와 얽히는 일이 없길 바랐다. 그런데도 의식이 돌아온 이갑수는 먼저 해인을 찾았다. 매우 위급해졌다는 작은 어머니의 전화를 다시 받고, 해인은 병원을 찾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날 용서할 수 있겠냐?”
이갑수는 힘없이 말을 했다. 그런데 해인은 대꾸 할 수가 없었다.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던 것이다. 초췌하게 죽어가는 한 늙은이를 용서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다 생각을 접었다. 이갑수가 앙상하게 말라버린 손을 내밀었다. 이갑수의 손이 부르르 떨었다. 해인은 나뭇가지를 잡듯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았다. 놀랍게도 이갑수의 손이 따뜻했다. 새삼 해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손은 차갑고 소름 끼칠 거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이갑수는 홀연히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아주 가뿐한 얼굴이었다. 해인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그때, 몹시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이갑수의 얼굴이 그녀가 깎은 양반탈 뒷면과 일치했던 것이다. 지난 일을 생각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닌데도 가슴 한구석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죽음은 누구나 겪는 관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숙연해졌다. 더구나 이갑수는 자기 스스로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하며 가볍게 떠났으니 더 바랄 게 뭐 있겠는가 싶었다. 무거운 등짐을 지고 힘겹게 산을 오르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이제는 해인이 가벼워질 차례였다.
동굴 안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도구들을 한쪽으로 끌어 모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바위에 기대고 서 있던 탈들은 오래전 잃어버린 전설을 생각하고 있는지 환한 웃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해인은 탈이 긁히지 않도록 무명천으로 몇 번 감싼 후, 가방에 차곡차곡 넣었다.

마지막으로 총각탈이자, 아버지 탈을 가방 속으로 넣는 순간이었다. 해인의 눈가에 이슬이 번져왔다.
“이제 우리 무거운 짐을 벗어도 될 것 같아. 이제 오빠를 원망하지 않아. 아버지가 총각탈로 환생했으니깐 말이야.”
자명을 만나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총각탈 눈에도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었다.
“아버지…….”
그녀가 소리 내어 흐느껴 울었다.
해인은 열두 개의 탈이 든 가방을 어깨에 메고 일어섰다. 잠시 눈앞이 흐릿하면서 의식이 가물거렸다. 현기증이 일어났던 것이다. 오랫동안 웅크리고 앉아 작업을 한 탓에 아랫배가 뻐근해왔다. 탈을 모두 완성하자, 동굴 안이 텅 비어져 보였다.

 

산을 내려오다 말고 해인은 산자락에 털썩 주저앉았다. 두 다리가 후들거려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천천히 일어나 산길을 더듬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얼마쯤 내려왔을까?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몸이 힘없이 무너졌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굴러 떨어졌다. 돌부리에 이곳저곳이 찍혔지만 아픔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이 털퍼덕! 하고 바위에 부딪치면서 풀어졌다. 그 안에 있던 탈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해인은 그것들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손쓸 겨를이 없었다. 몇몇 개의 탈이 계곡 아래 물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서 어떤 탈이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
자명이 없는 탈, 자명이 없는 탈방, 그리고 자명이 없는 모든 시간들이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았던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흩어져 있던 탈을 주워 모았다. 아뿔싸, 세 개의 탈이 사리지고 없었다. 그녀는 서둘러 가파른 계곡 아래로 내려갔다. 하지만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웅덩이는 검푸른 물빛을 띠고 있었다. 긴 나무를 가져와 그 속을 휘휘 저어보았다.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잃어버린 탈은 다름 아닌 총각탈, 떡다리탈, 별채탈이었다.

 <이경 약력>

1997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오라의 땅’으로 등단
2002년, 동서커피문학상 단편소설 대상 당선 ‘청수동이의 꿈’
2003년, 첫 장편소설 ‘는개’ 출간
장편소설 ‘는개’ 출간. 미국 하버드대학 도서관 소장(2003)
2006년, 대전대학교 대학원 석사 문예창작학과 졸업. 논문 ‘윤후명 소설에 나타난 모티브연구’
2007년, 단편소설집 ‘도깨비바늘’ 출간
2012년, 장편소설 ‘탈’출간
2012년, 제4회 김호연재 여성백일장 대상, 여성가족부장관상 수상
현재, 불교공뉴스 사장
메일: imk08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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