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그대로의 부처, 천태산 은행나무로부터 삶의 희망을 찾다

양문규 시인의 첫 산문집 『너무도 큰 당신』이 ‘시와에세이’에서 출간되었다. 이 산문집은 양문규 시인이 1999년 서울생활을 청산한 이후 영동으로 낙향, 2001년부터 2005년까지 만 5년 동안 영동 천태산 영국사 뒷방지기로 살면서 천년 은행나무를 통해 각박한 서울에서 받은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전한다.

양문규 시인은 1989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이 출발할 무렵 신경림 시인이 불러 올려 민예총 실무를 맡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서울살이가 시작되었다. 민예총 3년 복무한 양문규 시인은 이후 열림원 기획위원을 거쳐 1995부터 실천문학사로 자리를 옮긴다. 그해 120여 명이 출현한 2억 원의 자금으로 한국 최초 문인공동체 주식회사를 설립 기획실장으로 경영 일선에 참여한다. IMF 이후 불어닥친 경영 악화로 실천문학사를 퇴사, 1999년 고향으로 낙향한 양문규 시인은 고향 농막, 천마산 중화사를 거쳐 2001년 영국사 뒷방지기로 들고부터 서울행도 하지 않는 채 살았다. 이때 그는 귀거래사 격인 한 편의 시를 발표한다. “꽃나무,/우물가의 꽃나무//영원한 봄날의 꽃나무/꿈속에서도 꽃을 퍼붓던 꽃나무/오로지 하나의 집 위에/향그런 열매를 달던 꽃나무//모진 바람 몰아친다/저 밖의 바람/모스러진 꽃나무 모가지를 꺾고/그 커단 바윗덩이 우물을 메운다//집을 비운다/모든 것이 일순간//중략//꽃나무의 비애 외면하고/화정(花井)을 떠난다(163쪽)” “아빠 또 이사 가?”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집이 있는데, 그는 홀연 서울을 떠난 것이다.

“이 방에서 참 많이 울었네요. 꽃이 피면 핀다고, 눈이 오면 온다고, 그리운 사람들에게 전해야 될 텐데 나가지는 못하고 문자만 수천 통 날렸을 겁니다.”(247쪽) “바쁘게 뛰어다니던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그는 스스로 고향 땅에 유배되었다. 고향 인근 천태산 영국사에서 불사(佛事)를 벌일 때 인부들 숙소로 쓰던 판잣집 방에 들었다. 이후 주지 스님과 함께 대나무들을 베어 잘라, 겉모습이 흉한 판잣집 외벽에 붙여 거처를 대나무집으로 바꾸었다. 그는 영동읍에서 한참을 나와 도로변에서도 비좁은 산길을 힘겹게 올라가야 당도하는 천태산 영국사 대나무집에 틀어박혀, 눈과 비와 꽃과 은행나무에 마음을 비끄러매고 ”(248쪽)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응어리를 안고 떠나 그뿐이라면 새로 가 닿은 곳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꽃우물을 떠난 시인은 지혜롭게도 서울의 삶이 준 상처와 슬픔을 갈무리하여 새로운 마음의 상(相)을 얻기 위한 절차를 밟는다.”(95쪽) 영국사 뒷방지기의 삶이 그것으로 천년 은행나무가 그의 좌절과 절망, 아픔, 고통, 슬픔을 치유해줄 뿐만 아니라 꿈과 희망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거듭나게 해 준다.

양문규 시인은 영국사에 머무는 동안 그는 아주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바로 은행나무 울음을 직접 들을 수 있는 행운을 가진 것이다. “나는 능구렁이 울음 같기도 하고 황소울음 같기도 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애끓는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날도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저녁 공양을 끝내고 산행에 나섰습니다. 동안거를 끝내고 잠시 영국사에 머물기 위해 오신 선방스님 원묵과 함께였습니다. 다랑이 논에서는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들이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큰 울음이 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은행나무 곁에서 우는 소리 같기도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이상한 울음소리가 계속 흘러나오자 그는 은행나무에 귀를 대보고 머리가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듯한 신비롭기보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천태산 은행나무에 대한 전설은 여러 가지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울음소리와 관련된 전설은 가장 신비로우면서도 아픔을 더해줍니다. 은행나무가 슬피 울면 그것은 곧 국난이나 국상 등 환난과 재난을 예고하는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족상잔의 비극을 안겨준 6 ․ 25 동란, 고 육영수, 박정희 내외가 죽었던 해에도 은행나무는 어김없이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문규 시인은 “은행나무가 운다면 그 울음은 어떤 환난이나 재난을 예고하는 소리가 아니라 봄을 알리는 전령, 생명의 소리”로 명명하고 있다.

“천태산 은행나무는 천년을 넘게 생의 중심을 잃지 않고 서 있습니다. 나뭇등걸 속에 울음을 내장하고, 더 큰 울음을 키우고 있습니다. 지난봄 내내 나는 그 울음소리를 들으며 은행나무 곁을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소리였습니다. 겨울에서 봄으로 오는 소리, 미혹의 세계에서 각성의 세계로 오는 생명의 소리였습니다. 천태산 은행나무는 누대에 걸쳐 좌절과 절망을 제 울음으로 감싸고 누군가에게 사랑과 꿈을 안겨주었던 것처럼 오늘도 그렇게 웁니다./나의 삶에도 큰 울음이 배어 있길 바랍니다. 나는 생명의 소리를 들으러 은행나무 곁으로 다가섭니다. 먼 훗날 누군가도 은행나무 곁으로 다가서길 소망합니다. 봄이 오면, 천태산 은행나무는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울음을 울 것입니다.”(21쪽)

양문규 시인은 서울에서의 10년과 영동에서의 10년을 비교하여 들여다볼 때 “어느 세월 하나 보잘것없고 하찮은 것 없이 소중한 자산입니다. 서울에서의 민예총, 열림원, 실천문학사 등은 삶의 외연을 넓히는 데 부족함이 없이 풍요로운 삶을 선사해주”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영동에서의 농막에서부터 여여산방까지는 자연의 질서 위에 어떻게 살아야 진정한 가치를 이룰 수 있겠는가 궁구하는 사유를 제공하였습니다.” 라고 전한다. 신경림, 박운식, 함민복 시인 등과 고 윤중호 시인을 그리워하는 마음 한켠 시인의 삶을 영속시키는 사랑으로 지인들과의 만남을 구름 속에 핀 박꽃처럼 환하게 피우고 있다. 또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천년 은행나무가 함께하였습니다. 천태산 은행나무는 기쁨과 행복, 꿈과 희망, 고통과 분노, 좌절과 절망 등은 서리 분리되어 있지도 않고 함께하지도 않으면서 그냥 그대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5쪽)준 참 스승으로 예찬한다.

따라서 양문규 시인에게 “상처와 아픔을 안겨주었던 모든 사람은 나의 진정한 스승일 것이니, 서울생활을 뒤로 하고 울음 울던 낙향은 오히려 세상의 본질을 바로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라 자위”하면서 “그동안 서울의 바쁜 생활로 놓쳤던 자연의 질서를 몸으로 익히는 법도 체득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무엇보다 천태산 은행나무를 만날 수 있게 해준 셈이니”(104쪽) 이 세상 모든 사람과 자연만물을 참 스승으로 모셔야 하지 않겠는가 반문하면서 자연 그대로의 여여한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 곁에는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생명을 보듬고 키워 뭇 생명에게 삶의 기쁨과 희망을 선사하는 자연 그대로의 부처, 너무도 큰 당신 천태산 은행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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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문규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명지대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문학박사)하였다. 1989년 『한국문학』에 「꽃들에 대하여」 외 1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 『벙어리 연가』,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 『집으로 가는 길』, 『식량주의자』가 있으며 평론집 『풍요로운 언어의 내력』, 논저 『백석 시의 창작방법 연구』 등이 있다. 민예총 총무국장, 열림원 기획위원, 실천문학사 기획실장 등을 역임하였다. 1999년 서울생활을 청산한 이후 고향 농막, 중화사, 영국사를 거쳐 천태산 자락 여여산방에 거처를 두고 있다. 현재 계간 『시에』 편집주간, ‘천태산은행나무를사랑하는사람들’ 대표로 활동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존재양식으로 자연, 생명, 평화, 시가 어우러진 삶의 희망을 길어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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