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뉴스-문화] 얼음새꽃
달력 두 장을 막 뜯어낸 삼월 초입에
그대와 눈맞춤을 했습니다

혹한 시베리아 벌판
눈바람 끝에
혼자 세워 두고
견디라 했습니다

살고자 발딱거리는
숫구멍으로
폭설이 내려앉을 때마다
한 해를 돌아
그대 곁에 돌아올 자신이 없었습니다

지금 다시
모든 흘러가는 것에 맡긴다는 건
그대와 내가 처음처럼
입술과 입술을 맞대고

감출 수 없는
서로의 오장육부五臟六腑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얼음새꽃:복수초, 눈새기꽃, 설연이라고도 부르며 2월~4월 추위를 견뎌내고 개화하는 꽃이름

머리를 자르며

가위질 한번에
긴 머리카락이
미용실 타일 바닥으로
‘뚝’
떨어진다

무엇이 그리도 간절하여
부질없이
단숨에 잘려나갈 것을
키웠단 말인가

나도 모르는 새 자라
어깨까지 따숩게 감싸던
그 허물없는 것에
애꿎은 화풀이를 했나 보다

거리엔 설익은 겨울로
노란 낙엽비가 내린다
맥없이 춥다

돌아온 길

지름길을 두고 돌아서 왔습니다.

오던 길은 멀고 험했습니다
어쩌다 샛길에 곁눈질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후횐 접겠습니다
그 길 또한 나의 길이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걸어온 길보다
더 먼
돌아가야 할 길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투명종이

한 장에 백원 하는 투명종이를 준비물로 가져간 아이는 그림 위에 얹어놓고 바닥과 똑같은 그림을 찍어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한뜸한뜸 굵은 선을 먼저 그려내더니 작은 점까지 또랑또랑한 눈빛을 밝혀 거의 흡사한 원형의 그림을 담았습니다.

살며 닮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목구비 또렷한 겉모습보다
누구도 담아내지 못하는
그만이 가진 아이 같은 순수와
생의 치열한 부딪힘에서
타이르듯 지켜 가는 사랑이 있습니다.
오늘, 그의 가슴에 투명종이 살며시 올려놓고
그리고 싶은 그런 날입니다


<약력>
 이영옥 시인은 1968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하였다. 1988년 오늘의문학으로 작품활동을 시작, 1993년《해동문학》으로 등단, 제6회 대전예술신인상, 제22회 대전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집 『날마다 날고 싶다』 『아직도 부르고 싶은 이름』 『당신의 등이 보인다』 『가끔 불법주차를 하고 싶다』 『길눈』 등이 있으며, 2015년 대전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금을 수혜 받아 여섯 번째 시집 『알사탕』을 상재하였다. 한국문인협회, 문학사랑협의회, 대전문인협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문학잡지《문학사랑》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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