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뉴스-문화] 사진 속의 피조물

다음 날, 힘겹게 눈을 떴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 산속에서 길을 잃고 쓰러졌을 때처럼 눈앞에 별이 총총히 떠 있을 뿐이었다. 몹시 어지러워 사방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해인아. 정신 차려.”
자명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가 누워 있는 곳은 낯선 여관이었다. 술을 마신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 다음은 희미했다.
“어떻게 된 거야?”
“널 아프게 해서 미안해.”
해인은 자명의 손을 뿌리치고 돌아누웠다. 자명의 손이 어깨에 닿았다. 자명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아, 그 체온 때문에 도무지 자명을 떠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작은 아버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야. 그땐 내가 너무 어려서 아무 것도 몰랐어. 고작 열 살이었잖아. 급하고 해서 그 자들에게 아버지의 행방을 알려주었던 거야. 지금껏 살아오면서 무척 괴로웠어.”
자명도 억눌렸던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다. 눈가에 눈물이 가득했다. 해인은 자명의 목을 꽉 껴안고 엉엉울기 시작했다. 너무나 익숙한 냄새가 코끝으로 감겨들었다. 자명은 해인의 속살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자신의 육감을 어쩌지 못했다. 해인의 봉긋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가 살아 꿈틀거렸다. 그리고 향기가 솟는 그녀의 깊은 곳이 한동안 부르르 떨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어떤 장애물도 그들의 사이를 가로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서서히 그녀의 깊은 문이 열리고 자명의 피돌기가 거칠어지면서 그들은 서로의 육체 속으로 빠져들었고, 그동안의 고통을 말끔히 잊어버릴 수 있었다. 묘한 현상이었다. 일순간에 냉랭했던 지난날의 감정들이 눈 녹듯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그리고 그들은 예전으로 다시 돌아갔다.
하지만 자명은 유부남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현실은 냉혹했다. 자명은 정미영과 이혼을 하려고 했으나, 그 사이에 아내가 임신을 했던 것이다. 자명은 그 사실을 알고 몹시 놀랐으며, 처음부터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자명의 아이가 분명했다. 그와 너무도 닮은 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정미영은 아이를 볼모로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아이를 낳은 여자는 그 이상의 원초적 힘을 발산했다. 해인을 찾아와 포악한 행동을 하고 악담을 쏟아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명은 그녀로부터 멀어졌다.

아내에게 미안했던 감정조차 말라버리는 것이었다. 해인을 잊기 위해 정미영의 손을 잡았던 지난날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한동안 괴로워했지만, 포악한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아내의 모습에 점점 질려버렸다. 본디 그런 여자였던가 싶었다. 자명을 닦달하고 사랑을 강요하는 모습에 뒷걸음치고 말았다. 하루라도 빨리 그녀로부터 도망쳐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해맑게 웃은 어린 아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잠시 아이에게 마음이 기우는 듯 하기도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혈육에 대한 정이 몹시 그리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또 다시 자명과 해인은 이별은 선택하고 말았다. 하지만 아이가 첫돌이 되기도 전, 자명이 집을 나와서 작업실에서 혼자 생활했다. 해인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정미영이 갈전마을을 찾아와횡포를 부릴 때 처음 알게 되었다. 그녀는 해인이 자명과 함께 지내는 줄 알고 느닷없이 아이를 데리고 왔던 것이다.
“이런 말하는 거, 몹시 자존심이 상해요. 아이가 태어나면 모든 게 잘 될 거라고 믿었어요. 그이가 몹시 술에 취해 있던 날, 억지로 아이를 가졌어요. 정말 바보였어요. 당시 그 사람은 해인씨라고 생각하는지 계속해서 이름을 부르더군요.”

해인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자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미영은 아랫입술을 질근질근 씹으면서,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코를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그때, 잠에서 깨어난 아이가 칭얼대자, 콧물을 닦아내던 그녀가 블라우스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두 개의 단추가 톡 하고 빠져나가자, 뽀얀 젖가슴이 불쑥 드러났다. 그리고는 아기의 입술 속으로 검고 큰 젖꼭지를 쑥 밀어 넣었다. 아기는 허겁지겁 젖을 빨아댔다. 커다란 그녀의 젖가슴이 오소소 살 돋음을 일으켰다. 몹시 위압적이면서도 저돌적이었다. 그 어떤 말보다 해인을 꼼짝 못하게 했다. 해인도 그녀처럼 퉁퉁 불은 젖가슴을 꺼내 아이에게 물리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뽀얀 젖가슴이 퉁퉁 불어 있는 한 자명이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불길한 생각이들었다.

정미영이 돌아가고 며칠 후, 자명이 해인을 찾아왔다. 몹시 초췌한 얼굴이었다. 해인은 터질 것 같은 뽀얀 젖가슴을 떠올라 자명을 밀어냈다. 그런데 자명은 무릎을 꿇고,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어 헤쳐 그 속에 얼굴을 묻고는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젖을 빨기 시작했다. 해인은 아기에게 퉁퉁 분 젖을 물리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와락 자명의 머리를 꽉 껴안았다. 그리고 그는 해인의 몸 속에서 이내 잠이 들었다.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감정이 세 사람 사이를 오고갔다.
 
그 와중에도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고, 해인은 안동과 갈전마을을 오가며 탈을 깎기 시작했던 것이다. 해인에게 있어 탈은 자명에게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기도 했다. 하지만 쉽지가 않았다. 독초처럼 자란 감정을 도려낸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갈전마을에서 해인이 깎는 탈마다 자명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스승은 그런 해인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건 탈이 아니라, 한낱 공장에서 찍어내는 장사치들의 밥거리제. 식충이가 될 요량이면 하루 빨리 치워버리라.”
해인은 정신을 가다듬고 손가락 마디에 핏물이 돌 정도로 끌을 잡았다. 그리고 탈을 깎는 손의 중심도 잡아갔다. 자명은 아이 문제로 그녀의 집을 오고갔다. 해인과 함께 있다가도 아이가 아프다는 연락이 오면 야간열차를 타고라도 서울로 달려갔다. 그런 자명을 탓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자명의 그림자로 살아간다는 것에 점점 염증이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서울 예술사진 공모전에서 자명의 사진작품이 입상을 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자명은 분명 시상식장에 해인이 축하해주러 와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수상식 날 장소에 도착하고 보니 정미영이 아이를 들쳐 업고 식장에 나와 있었다. 자명은 주최 측에서 부인과 동행해 달라는 요구가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둘러대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시상식장에서 본 자명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으며. 해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순간, 해인은 뭔가 가슴에서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시상식장 안은 부드러운 음악이 흐르고, 아늑한 조명과 축하 화한으로 가득 했다. 사람들의 축하를 받는 동안 자명은 몹시 감격해했다. 해인은 자명의 그런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을 했다. 자명이 자신을 한껏 뽐내도 부족함이 없는 자리였으니 그럴 법도 했다고 애써 위로를 하기 시작했다. 시상식장 옆에는 입상된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자명의 작품이 가장 중앙에 걸려 있었다. 해인은 자명의 작품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사진 속의 피조물은 바로 해인이었던 것이다. 그 작품이 나오기까지 지리산을 세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했던 것이다. 자명의 작품은 심사위원들에게서 자연친화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화면 속의 모델과 자연이 합일을 이루고 있었다. 사진 작품을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으면 빨려들 것 같은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기법이었다.
사진 기자들은 정미영를 불러내 자명과 함께 작품 앞에 나란히 세웠다. 순간 뒷좌석에 앉아있던 해인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활짝 웃고 있는 자명의 미소가 정미영의 눈 속에 쏙 들어가는 것이었다.
해인은 서둘러 그 자리를 뛰쳐나왔다. 지독한 질투심이 증오로 돌변하더니, 사랑의 깊이만큼 그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건물 기둥에 기대어 목이 따갑도록 소리 내어 펑펑 울었다.
그때 자명이 해인 앞에 나타났다.

“더 이상 미친 짓을 할 수 없어.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나를 이용하려 들지 마. 오빠는 오빠의 길을 가고, 난 내 길을 가자고. 더 이상 서로의 인생에 끼어들지 마.”
“해인이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이 작업을 해내지 못했을 거야. 널 숨겨 두어야 하는 나도 가슴이 아파. 미안해. 그렇다고 널 이렇게 보낼 수는 없어.”
자명은 행사의 주인공이므로 다시 축하자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해인은 자명의 이중적인 행동에 몸서리를 쳤다. 제 정신이 아니었다.
“당신 작품은 모두 위선이야.”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자명의 작품에 독설을 내뿜는다는 것은 그가 추구하는 예술을 부정하는 말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자명도 곧 자제력을 잃었다. 화를 버럭 내더니 행사장으로 사라져버렸다.
며칠 후, 해인이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있을 때, 자명이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을 하고 찾아왔다. 아니 너무 차갑다 못해 시퍼런 눈빛이었다. 자명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어가며 말을 이었다.

“우리 당분간 만나지 말자. 내가 멀리 여행을 갔다고 생각해. 내 이기심 때문에 널 너무 괴롭히는 것 같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보자. 서로를 죽이는 짓은 이제 하지 말자!”
해인은 냉기가 가득한 자명의 얼굴을 보았다. 뭔가 일을 벌일 것 같은 위기감에 덜컥 겁이 났다. 확실히 자명이 그녀를 버리고 떠나려 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던 것이다. 그가 먼 여행이라도 떠날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자명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전쟁 속으로 뛰어들었다.

전쟁의 잔상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자신이 처해있는 인생의 패턴을 바꿔보려고 시도한 것이 틀림없었다. 시상식장에서 그의 작품에 난도질을 했던 독설이 문제였다. 그의 가슴에 박힌 독을 해독하기 위해서라도 전쟁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던 것이라고 해인은 생각했다.

 

 

이경 약력

1997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오라의 땅’으로 등단
2002년, 동서커피문학상 단편소설 대상 당선 ‘청수동이의 꿈’
2003년, 첫 장편소설 ‘는개’ 출간
장편소설 ‘는개’ 출간. 미국 하버드대학 도서관 소장(2003)
2006년, 대전대학교 대학원 석사 문예창작학과 졸업. 논문 ‘윤후명 소설에 나타난 모티브연구’
2007년, 단편소설집 ‘도깨비바늘’ 출간
2012년, 장편소설 ‘탈’출간
2012년, 제4회 김호연재 여성백일장 대상, 여성가족부장관상 수상
현재, 불교공뉴스 사장
메일: imk08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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