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뉴스-문화] 심야의 산책

1
유리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듯
숨길 수 없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세월이 간다
허공에서 사라지는 울림통의 맥박을 아쉬워하며
몸속에서 슬며시 달아오르는 취기를 앞에 두고서야
마술 장면에 놀라는 기분으로 속고 웃는다

2
누군가 담을 넘었나 보다
개 짖는 소리 들리고
밤하늘
달만 덩그렇게 내려다보고 있다
참, 개소리 우렁차다
컹컹, 컹컹컹
개를 발로 찼는지
깨갱거리는 소리 들린 듯하다가
더욱 커지는 개 짖는 소리
야심한 밤에 주인은 뭐하는지
개야, 개야
주인은 몰라도
개 짖는 소리 우렁차다

3
휴일 저녁 공원에 나온 사람들의 편안한 옷차림
여유 있는 모습들 속에서 지친 나를 잊고자
같은 방향의 움직임으로 걷게 된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힘들게 하는지
생각하면 기회가 주어질 수 없음에 슬퍼했고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이 상처로 남는다

반복이 지루하고 신나지 않더라도
신호등 색깔이 변하면 가야 하는 것처럼
목적지를 향하여 혼자 걸으며
공원에 나온 사람들과 함께
밤이 깊었다

도시의 연민(憐憫)

검은색 사이로 흔들리는 노란 달 외롭다
하나, 둘 불 밝힌 밤하늘
곳곳에 숨어 있는 태초의 흔적들
신호등같이 반복되는 피난의 술잔
절벽으로 밀어대는 문자들
오해의 연속으로 피멍 들고
출구 없는 미로 속에 공하나 떠돈다

당신도 아픈 사람입니까?
아니요, 나는 괜찮아요

비오는 거리에서
가난한 가방을 안고
시외버스터미널 우등 버스에
몸을 싣는다

당신은 누구를 만나러 가십니까?
새로운 사람을 만나러 갑니다

점점이 불 밝힌
도시의 야경이 아름답다

 

작은 등불이 되고 싶다

오늘도 외로울 수밖에 없는 하루의 휴식
화분에 물을 주며 여유를 찾는 순간
정처 없이 흐르고 있는 구름이
바람의 힘이라는 것을 느낀다

혼자서 자라고
시들지 않게 물을 주어야 하는
주변의 식물들처럼
사소한 감정에 관심을 기울이는
오피스텔의 늦은 오후

등 뒤에 작은 등불을 켜는 시간
어둠의 그림자
허무의 올가미를
씌우기 전
어서 빨리 등불을 켜야 한다

어둠 속에서
작은 등불이 밝혀주는
작은 섬 하나
그 안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하리라

 

 

<약력> 이태진
1972년 경상북도 성주 출생으로 2007년 계간 『문학사랑』으로 등단하여 시집 『여기 내가 있는 곳에서』, 공저 『인생의 받침돌이 되어줄 UCC 마음사전 2g』. 〈제 11회 대전예술신인상〉, 〈제 42회 인터넷문학상〉을 수상. 무대조명 디자이너, 공연 공간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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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ebook : 이 태진(Leetaejin)이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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