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뉴스-문화] 노들강변 주지 한 쌍

해인이 양반탈을 완성한 뒤로 부네, 중, 초랭이, 선비, 이매, 백정, 할미탈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양반, 백정, 이매, 부네, 각시, 중탈은 모두 새치름히 실눈을 뜨고 있는 표정으로 조각해야 했다. 탈들의 코와 눈을 조각하는 동안 음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심목고비(深目高鼻)의 수법으로 조각했다. 조각도를 잡는 사람에 따라 높낮이의 정도 차이는 있지만, 하회탈이 지니는 특성을 그대로 복원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했다.

양반과 선비, 그리고 백정과 중의 턱은 따로 만들어 노끈으로 연결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표정이 자유롭고 다양하게 변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할미, 초랭이, 부네, 각시탈의 턱은 움직이지 않지만, 눈자위, 콧등, 광대 뼈, 입 언저리의 높낮이를 달리하기 때문에 얼굴 표정이 수시로 달라지곤 했다.
양반탈과 백정탈을 깎다 보면 서로 다른 차이가 있다. 이 두 개의 탈은 정반대의 기법을 이용한 탓이다. 양반탈은 이마가 코보다 낮고, 백정탈은 이마와 코의 높이가 같았다. 또한 백정탈의 주름 선은 모두 위로 치켜 올라가고, 양반탈의 주름 선은 수평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턱 연결고리도 백정탈은 왼쪽이 오른쪽보다 짧았고, 양반탈은 왼쪽이 오른쪽보다 길었다. 언뜻 보기에 백정의 웃음은 양반의 웃음을 흉내 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천민신분에 대한 콤플렉스를 의도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백정탈은 고뇌에 찬 얼굴이었다. 건장하고 힘센 장년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주름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며, 살생을 해야 하는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내기 위한 방법이었다.
해인은 하회탈 중에서도 가장 균형미가 돋보이는 탈은 백정탈이라고 생각했다. 언뜻 보기에는 오른쪽 눈썹선, 눈두덩이, 눈구석선, 볼선 모두가 왼쪽보다 위로 올라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왼쪽 부위와 부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불균형인데도 불구하고 조화롭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해인은 잠시 칼과 끌을 내려놓고 자료를 뒤적였다. 주지탈에 대한 자료를 찾기 위해서였다. 탈 중에서도 뒤늦게 관심을 집중시킨 탈이 바로 주지탈이었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두 개의 주지탈을 동굴에서 만들지 않고 탈방으로 내려가 만들 생각이었다. 주지탈은 다른 하회탈과 전혀 다른 기법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리나무로 탈을 깎는 것이 아니라, 눈, 코, 입을 따로 만들어 얇은 오리나무 판에 붙여야 했다. 타원형으로 자른 얇은 오리나무판에 코와 입을 따로 만들어 붙이고, 표면에 직접 붓으로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눈을 그려 넣는 기법이다. 그리고 머리에 쓰는 보자기를 꿰매어서 구멍을 뚫으면 완성이었다.
주지탈은 사자 모양이다. 주지의 몸은 용, 머리는 사자 모양이며, 귀신의 춤이라 일컫기도 했다. 암주지, 숫주지의 춤이라 하기도 하는데, 보는 이에 따라 꿩 싸움이라 하기도 했다. 대갓집에 초청되어 놀 때에 주지가 양곡가마니나 솥뚜껑 또는 옷 등을 물어 당기면 성황신이 필요한 물건이라 여겨 내어주었던 것이다.

주지는 서로 뛰면서 싸우다가 한 마리가 지쳐 쓰러지면 한 마리가 그 위에 올라타서 성교하는 듯한 행동을 했다. 그러다가 한 마리가 반대 방향으로 쓰러졌다. 이때 암컷이 이겨야만 그해 풍년이 들고 다산을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주지탈은 신성하고 무서운 상상의 동물을 형상화한 것으로, 암수 주지가 서로 어울려 격렬한 춤을 추는 것은 잡귀와 사악한 것을 쫓아내어 탈판을 정화하기 위함이었다.

노들강변 주지 한 쌍
푸른 콩 하나를 물어 암놈을 주고
암놈이 물어 수놈을 주고
수놈 암놈 크르릉소리
청천과부는 한숨만 쉰다
얼씨구나 좋네 지화자 좋네
아니노지는 못하리라.

해인이 탈에게 얼을 빼앗기는 동안 초랭이가 후이! 후이! 주지들을 내쫓는 소리가 들려왔다.
초랭이탈을 깎기 위해 끌을 다듬었다. 그리고는 오리나무를 집어 들어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초랭이는 마을의 허드렛일을 도맡아서 하던 천민이었다. 해인은 오리나무에 초랭이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순박한 얼굴은 움직일 때마다 설핏 눈자위가 씰룩거렸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둥글넓적하며 납작한 코를 하고 있었다.

초랭이탈은 때때로 권세를 부리는 세도가에게 불만을 잔뜩 품고 있는 표정이다. 입술은 두툼하고 눈꼬리는 아래로 살며시 쳐졌다. 양 볼은 뭉툭하게 튀어나와 있어 다소 고집이 세고 미련스럽기까지 했다. 한마디로 말해 선량하면서도 우직스러운 면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초랭이탈은 다른 탈에 비해 크기가 약간 작았다. 아직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여보 각시, 사람 괄시하지 마소

휴! 해인은 몹시 피곤했다. 며칠째 기온이 떨어져 계곡물이 얼어 버렸다. 밤에는 기온이 더 떨어졌다. 낮부터는 감기 기운이 돌고, 몸에 미열이 오르락내리락 했다. 체력이 많이 약해져 탈이 모두 완성될 때까지 버텨줄지 걱정이 되었다.
오후가 지나자, 해인의 머릿속은 고등어 등선처럼 퍼런 날이 설 만큼 날카로웠다. 몸이 점점 느슨해져, 가슴을 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얼마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몸피에 살 돋음이 올올이 일어나자, 아랫배가 뻐근해 왔다. 소변보는 것도 시원하지가 않았다. 쭈그리고 앉아 작업을 하다 보니까, 혈액 순환에 장애가 일어난 모양이었다.

부네가 중을 유혹하기 위해 요염한 자세로 오줌 누기를 시도 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여보 각시, 사람 괄시하지 마소. 일가산에서 늙은 중이, 이가산 가는 길에, 삼로 노상에서 사대부녀를 만나 각시 오줌 냄새를 맡고 육정이 치밀어서, 칠보단장 아해도, 팔자에 있는 동 없는 동 구별할 게 뭐 있는 껴? 여보 각시, 몸이나 한 번 주오.”

부네가 몸을 꼬면서 걸어가 중을 유혹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부네는 요염한 여성의 색이 흐르는 탈이다. 또한 아름다운 여성상을 대변하는 탈이다. 둥글고 모나지 않는 얼굴선, 초승달처럼 가는 눈썹과 붉은 입술은 당시 미인의 얼굴이 그러했음을 의미했다. 해인은 부네의 탈은 어렵지 않게 깎을 수 있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랫가락에 흥을 얻었는지 허투룬 갈질이 아닌 칼끝과 나뭇결이 탁탁 맞아떨어졌다.

마지막으로 해인이 가장 의미를 두고 있는 떡다리탈, 별채탈, 총각탈을 복원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동안 모아놓은 자료를 훑어보았다. 세 개의 탈은 특별했다. 그 흔적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탈을 복원하려면 몸주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는 탈이기 때문이었다.
해인은 오리나무와 조각칼, 그리고 나무망치, 자귀, 크기가 다른 몇 개의 끌과 띠톱을 동굴 안쪽으로 옮겼다. 사포와 붓, 돋보기가 든 상자도 함께 옮겼다.

또 하루가 지났다. 몸이 전날 보다 훨씬 가벼워졌다.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을 때, 떡다리탈, 별채탈, 총각탈을 완성해야 한다는 욕심에 몸을 바삐 움직였다.
지금까지는 동굴 입구 쪽을 바라보고 탈을 깎았지만 앞으로는 동굴 안쪽을 보며 탈을 깎기로 했다. 동굴이 깊지 않아서 벽 안쪽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동굴 안쪽 바위 생김새가 여러 가지 형상을 하고 있었고, 램프의 불빛 움직임에 따라 바위의 모양도 제각기 변했다. 건장한 남자의 흉상과 여인의 얼굴, 그리고 수초 사이로 물고기가 노니는 장면들이 그려졌다.

스승은 세 개의 탈을 찾기 위해 미나미센키치의 흔적을 찾아 일본으로 갔던 적이 있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별 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미나미센키치가 실존 인물인가조차 분명하지 않았으며, 스승의 힘으로는 미나미센키치의 후손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 후손이 살고 있다 하더라도 촌부에 불과한 스승을 상대해줄 리 없었을 것이다.

세 개의 탈에 대한 자료는 스승 또한 많지 않았다. 떡다리탈, 별채탈, 총각탈을 복원하려는 방법 중 가장 도움이 된 자료는 탈춤마당 대본이었다. 사실 기술적인 기교를 터득해서 그 탈을 깎는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몇 년 전, 공예가 몇몇이 하회마을에 모여 탈을 복원하려고 했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다. 쉽게 접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하회탈을 복원하는 작업은 신탁을 받은 자만이 가능한 일이라고 결론지었다.

자귀로 둥글게 가다듬은 오리나무 한 덩이를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외형을 적당하게 오려낸 뒤 뒷면부터 파내기 시작했다. 떡다리탈을 섬세하게 다듬기 위한 작업이었다.
초벌 정리를 해둔 오리나무 표피의 색은 짙은 황토색을 띠고 있었다. 떡다리의 이미지와 딱 맞아떨어졌다. 떡다리는 평민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세상이 어지럽고 나라의 공출이 심해 먹고 살기가 빠듯했던 시절, 백성들의 원성은 극에 달했다. 떡다리는 그런 백성들의 불만을 대변해주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얼굴 표정이 성난 듯 굳어 있었다. 풍족한 삶을 누리고 살았던 양반탈처럼 환한 얼굴이 아니었다. 온갖 불만이 잔뜩 서린 눈자위와 입매는 날카롭기까지 했다. 오죽했으면 지금도 경상도 말에 ‘문디 떡다리 같다’라는 말이 남아 있을 정도일까.

해인은 조심스럽게 나뭇결을 살려가며 파내려 갔다. 조각도를 45도 기울기로 세웠다. 떡다리의 우직스러운 얼굴이 나무 위에 살얼음처럼 어리고 있었다. 양반탈과 중탈, 그리고 백정탈과 달리 떡다리탈은 각도를 달리했다. 입가와 눈가의 자잘한 주름을 섬세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눈, 코, 입의 구멍을 뚫어 앞면과 일치하도록 했다. 그리고 마지막 작업으로 실톱으로 턱을 분리한 다음 안면의 주름살을 새겨 넣었다.

작업을 마치면, 떡다리탈의 거친 부위를 사포로 문질렀다. 그리고 완성된 떡다리탈을 바위에 세워 두었다. 그동안 깎아둔 탈들도 바위에 기대고 세웠다. 옻칠과 한지를 먹이지 않아 아직 미완성이었지만 모두들 제각기 웃음을 담고 있었다.
다음은 별채탈을 깎을 차례였다. 별채탈은 일곱째 탈마당에 등장하는 탈이었다. 별채는 탐관오리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나라에 기근이 들 때마다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가 다시 거두어들이는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별채는 저승사자와 다름없는 지위였을 것이다.

 

별채의 상은 이마가 좁고, 아래턱이 뾰족하며 볼에는 살점 하나 없이 주름만 가득했다. 이런 상은 욕심이 과했으며, 그 욕심 때문에 낭패를 보는 상으로 해석했다. 자신의 배를 가득 채워도 허기를 느끼는 사람이었기에 욕심을 끝없이 부렸다. 따라서 수련을 하지 않으면 평생 빈하고 외롭게 살 얼굴상이었던 것이다. 때에 따라서 별채는 지위가 높은 상전에게는 허리 굽혀 충성맹세를 했으면서도 하층민들에게는 온갖 행패를 부렸다. 심지어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해 백성들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했던 것이다.
별채탈을 보니, 날카로운 턱 선이 한 눈에 들어왔다. 눈자위는 떨림이 일어날 듯 가늘었으며, 아래턱 선도 좁았다. 별채의 번뜩이는 두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는 듯했다.
 
눈가에는 자잘 자잘한 주름을 여러 가닥 새겨놓아 신경질적으로도 보였다. 눈을 치켜들면 마치 콧등이 실룩거릴 정도로 코의 길이 또한 짧았다. 턱은 또 어떠한가. 분리되었지만 끝이 뾰족해서 아랫사람이 따르지 않는 형상을 하고 있다. 입술은 아래로 축 쳐졌으며,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아직 미완성이지만 별채탈을 보고 있으려니, 해인은 작은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주머니마다 가득 돈을 채웠는데도 불구하고 허허로워하는 그런 위인이었던 것이다.

해인은 점점 조각칼 끝이 오리나무에 착 감겨들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칼날의 각도를 45도로 잡았다. 조금의 오차라도 생기면 전혀 다른 모양이 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나무를 베어냈다. 별채탈의 이마를 좁게 하려면 턱을 뾰족하게 빼야했다. 별채탈의 얕은 인중을 깎아내는 동안 검지의 힘을 풀었다. 완성한 별채탈을 바위 안쪽에 세워 놓았다.

어허이 달기요 어허이 달기요
어허이 달기요 어허이 달기요
저 건너 저산정기가 여와 뚝 떨어졌네
어허이 달기요 어허이 달기요
언지 노동을 모아두세
어허이 달기요 어허이 달기요.

별채탈의 입술에서 ‘달기요’가 흘러나왔다. 별채에게 짓밟혔을 많은 사람들의 고통이 섞인 노랫가락일 수도 있었다.
해인이 서울 생활을 정리하기 시작한 것은 하회마을에서 스승을 만나고부터였다. 갈전마을 뒷산 일부를 토지 정리를 해 이웃 주민에게 넘겨 돈을 마련했다. 그 사실을 알고 이갑수의 횡포는 날로 포악해지더니, 한동안 거동을 하지 않고 잠잠한 것이었다. 해인은 잠잠한 시간이 두려웠다. 이갑수가 무슨 일이라도 꾸미고 있을 것만 같았다. 이갑수가 작정을 하고 모사를 꾸민다면 당하지 않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일본 경찰과 손잡고 있는 상황이라서 안동에서는 거들먹거리며 세력을 과시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사진관 작은 어머니가 해인의 작업실로 찾아왔다. 작은 아버지가 뇌출혈을 일으켜 쓰러졌다 깨어났는데, 해인이를 만나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아, 그래서 이갑수가 조용했던 것이다. 해인은 단박에 거절했다.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만 같았다. 생부를 죽인 장본인을 병문안을 간다는 게 말이 되냐고 따져 물었다. 이갑수의 처는 그런 말을 듣고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돌아갔다. 며칠 후 재차 또 이갑수의 처가 해인을 찾아왔다.

해인은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들인지 들어나 보려고 자명과 함께 이갑수를 찾아갔다. 병상에 누워 있는 작은 아버지 이갑수는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예전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눈두덩이는 푹 꺼져 있었다. 불과 석달 전만해도 안동에서는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세도가 당당했던 인물이었다. 이갑수의 쇠잔해 보이는 얇은 가슴팍이 거칠게 뛰었다. 그런 몰골로 변하다니, 해인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년만년 갈 것 같이 위세에 온갖 협박을 하더니만, 힘없고 병든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에 마음이 허무하기까지 했다.

작은 아버지 이갑수는 작은 목소리로 겨우 말을 이어갔다.
“네가 김 사장 아들과 결혼을 해야만 우리 모두가 살 수 있다.”
해인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병실 문을 열고 나오려 했다. 아직도 조카딸을 팔아먹으려는 치졸한 생각을 하고 있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때, 이갑수가 힘껏 해인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앉으며 자신을 한 번만 도와 달라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사업투자를 잘못해 곧 집과 가게가 경매에 넘어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차갑게 외면해버렸다. 그때 해인의 곁에 서 있던 자명에게 이갑수가 소리를 질렀다.

“형이 죽은 것은 모두 저놈 때문이야. 내가 죽이지 않았어. 네놈이 알려주지만 않았어도 형이 그렇게 당하지는 않았어.”
자명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모두 당신이 꾸민 계획이잖아요? 저에게 뒤집어씌우지 마세요.”
“결과가 그렇게 되었잖아. 형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잔인하기로 소문난 사채업자였어.”
“사장님이 사채업자들과 손잡고 뒷거래를 하던 분이 아니었나요?”
“그야, 형님의 명의를 이용해 사채업자의 돈을 빌려 사진관을 확장하려고 했었지.”
“네놈이 형이 있는 곳을 알려주어서 변을 당했던 거야.”
“그때 사장님이 분명 깔아뭉개라고 말했어요.”
“뭐라고? 이놈이!”
와장창! 이갑수가 곁에 있던 컵을 집어 던졌다.

해인은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들의 대화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뒤에서 자명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어떤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그 일로 인해 자명과 해인 사이에 얼음 장벽 같은 게 가로 막고 섰다. 고의든 타의든 친부의 억울한 죽음이 걸림돌이 되었다. 해인의 냉랭한 마음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해인과 자명은 그 뒤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그 사이 자명은 정미영이라는 여인과 결혼을 해버렸다. 자명의 후배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들은 해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그를 찾아갔다. 그녀는 자신의 그런 행동에 어이없어했다. 떠나려하는 자명을 붙잡아야한다는 생각뿐이었던 것이다.
늦은 밤, 해인이 자명의 작업실 문을 두드리자, 정미영이 사진을 한 바구니 들고 문을 열어주었다. 같은 공간에 산다는 것이 그대로 전해질 만큼 그들에게서 친밀감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해인은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문을 열고 다시 나오려는데 정미영이 해인의 팔을 붙잡았다.

“해인씨, 차라도 한잔하고 가세요. 혼례식 때 못 봐서 무척 서운했어요.”
그녀는 해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친근하게 다가왔다. 해인은 얼굴이 화끈거리고, 몸이 딱딱하게 굳어 옴짝할 수 없었다.
“자명 씨하고 함께 자랐다면서요. 친 남매나 다름없는 사이라는 소릴 들었어요.”
“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군요. 그럼 제 아버지 죽음에 대해서도 알고 있나요.”
“해인아!”
“아버지의 죽음과 오빠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거 알아. 물론 작은 아버지의 음모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 꼭 이렇게까지 했어야 해. 좀 더 시간을 주었어야지. 오빠와 헤어지고 내개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해인아, 정말 미안하다.”
“난 우리 사이에 뭔가 남아 있다고 생각했어. 이제 정말 끝이야.”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순간, 손끝이 부르르 떨려 손잡이를 찾지 못했다. 몸으로 힘껏 밀었다. 덜컹 하고 문이 열렸다. 이젠 정말 자명과 끝이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해인은 거리를 배회했다. 도무지 돌아갈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거리에 어둠이 짙게 내려앉고 있었다. 발이 퉁퉁 부어올라 더 이상 걸어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거리에 있던 가게로 불쑥 들어갔다. 그리고는 주문한 술을 단숨에 들이키기 시작했다. 주위에 술을 마시던 남정네들이 힐끗거리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여자 혼자 앉아 연거푸 술을 마시는 모습이 쉬운 여자로 보였던지 몇 명의 남자들이 합석을 요구했다. 해인은 목구멍이 막혀왔다. 서서히 어깨가 풀리면서 몸이 축 늘어졌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 후, 자명이 해인의 앞에 턱 하고 나타났다. 해인은 흐릿한 자명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금세 흩어질 무늬가 연속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들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모든 게 캄캄했다.
그녀가 바로 의식을 잃었던 것이다.

 이경 약력

1997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오라의 땅’으로 등단
2002년, 동서커피문학상 단편소설 대상 당선 ‘청수동이의 꿈’
2003년, 첫 장편소설 ‘는개’ 출간
장편소설 ‘는개’ 출간. 미국 하버드대학 도서관 소장(2003)
2006년, 대전대학교 대학원 석사 문예창작학과 졸업. 논문 ‘윤후명 소설에 나타난 모티브연구’
2007년, 단편소설집 ‘도깨비바늘’ 출간
2012년, 장편소설 ‘탈’출간
2012년, 제4회 김호연재 여성백일장 대상, 여성가족부장관상 수상
현재, 불교공뉴스 사장
메일: imk08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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