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뉴스=손혜철 기자] 서울대공원에서는 오는 7월 16일 저녁 6시부터 한여름밤 야간개장(2011 서울대공원 별밤축제 : 7.16 ~ 8.31)에 맞춰 축제분위기 조성을 위해 과천무동답교놀이(경기도 무형문화재 제44호)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지난 2009년, 서울동물원 개원 100주년을 맞아 야생성이 살아 숨쉬는 서울동물원의 밤의 모습을 시민들에게 공개해 큰 호응을 얻어온 서울대공원 야간개장은 올해로 3년째를 맞는다.

서울대공원은 지난 2월「서울대공원 사회공헌 활성화 계획」수립이후 지역사회의 인프라 접목을 위해 과천문화원과 MOU를 체결했다.

▲서울대공원․과천문화원간 인프라를 접목한 문화콘텐츠의 개발과 공유 ▲전통문화 공연을 통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문화 창달 ▲전통문화를 접목한 다양한 볼거리 기획 및 전시 ▲상호 상생을 통한 상승효과(시너지효과) 창출‘ 등을 함께 해 나가기로 했다.

과천 무동답교놀이는 정조대왕의 효행과 결부되어 있다.

과천 무동답교놀이는 조선조 제22대 정조대왕 때부터 전해져 왔다. ‘정조대왕은 선친인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비통하게 여겨 과천을 지나 화성으로 능행을 다녔다. 이때 과천 사람들이 무동답교놀이를 벌여 임금을 환영하며 행덕을 찬양 했으며 이에 대왕께서 크게 기뻐하셨다.”라는 말이 구비전승되고 있다. 이것이 그 뒤에도 지역 주민의 민속놀이로 전해져 내려 온 것이다.

이날 공연에 서울대공원은 과천노인종합사회복지관 및 대한노인회 과천시지회 등의 어르신들을 초대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이원효 서울대공원장은 “서울대공원의 인프라와 과천문화원의 문화콘텐츠를 접목, 새로운 패러다임의 공원문화를 활성화하여 전통과 문화가 어우러지는 새로운 문화 공원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 말했다.
 
“무동답교놀이”에 대하여
'무동답교놀이'란 명칭은 무동놀이와 답교놀이를 합한 말로 이 놀이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생긴 말이다. 먼저 ‘무동’이라는 말은 원래 조선시대 궁중의 잔치때 당악 정재를 추던 어린 소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도 무동의 전통은 이어졌으며 민가로 흘러나와 사당패와 선소리패에서 춤과 곡예를 하는 어린 소년들이 된 것이다. 걸립패나 마을굿에서도 나이 어린 소년을 뽑아 여장을 시켜 남자의 어깨 위에 올라가서 춤추게 했다. 이것은 궁중에서 정재를 하던 무동이 여장을 했던 것을 본 뜬 것이다. 무동놀이는 보통 4-8명으로 구성되는데 노랑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고 댕기를 드린다. ‘답교’ 곧 다리밟기는 다리병을 앓지 않기 위해 보름날에 다리를 밟던 세시풍속의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 다리밟기를 하면 다리병을 앓지 않는다는 관념이 강한 것은 발음이 같은데서 생긴 관습 탓이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옛날 한양에서는 정월 보름 저녁에 종이 울리면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다리밟기를 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혼잡을 이루었다고 한다. 같은 마을의 젊은 패들이 집단으로 하거나,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때를 지어 다리밟기를 할 때에는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면서 혼잡한 가운데 여흥으로 기분을 돋우는 일도 있었다. 여기에서 다리밟기는 답교놀이로 발전을 하게 되었다. 답교놀이는 일정한 절차가 있는 것이 아니라, 풍물을 치거나 여기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며 군중과 함께 즐기는 것이다. 풍물을 치며 마을 사람들이 모여 즐기는 이 두 놀이가 합쳐지면서, 명칭도 무동놀이가 포함된 답교놀이라는 뜻의 무동답교놀이로 부르게 되었다.

현재의 공연을 보면 무동마당과 답교마당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고 무동놀이가 진행되는 체로 답교놀이가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동놀이는 시간적인 구애를 받지 않지만 답교놀이는 정월 보름에 하는 시간적인 제약이 있는 놀이이므로 무동놀이가 포함된 답교놀이라는 뜻으로 보는게 맞다고 하겠다. 무동답교놀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민속학자 심우송씨와 과천 노인들에 의해 다시 재연되면서부터였고, 1982년 전국민족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면서부터 일반인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무동답교놀이는 이 지역의 이어져 오다가 일제침략기에 압제로 중단된 뒤 잊혀진 놀이가 되었다. 그 뒤 다시 되살아나게 된 것은 민속학자 심우송에 의해서였다. 심우송은 1981년 무동답교놀이의 원형을 복원하고 전체 줄거리와 함께 2명의 조교사를 보내 당시 과천동 노인회장인 이윤영과 마을 사람들에게 무동답교 놀이를 가르쳤다. 이듬해인 1982년 과천민속보존회의 주도로 제23회 전국민족예술경연대회에 경기도 대표로 출연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그 뒤 무동답교놀이는 내용과 형식에서 두 차례의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그 첫번째 변화는 1989년 현재의 회장인 신동식씨가 총무직을 맡으면서 무동춤과 풍물굿을 보강한 것이다. 한국무용가 정주미의 도움으로 무동춤을 다시 가르치고, 농가에서 풍물을 할 줄 아는 젊은 사람을 영입했다. 그리고 1992년에는 너무 단조롭게 진행되던 놀이에 과천의 또다른 민속인 지신밟기, 당나무고사, 선소리놀이, 우물고사, 마당놀이 등을 추가하여 다채로운 형식을 띠게 하였다. 현재 무동답교놀이는 마을 대동놀이나 민속놀이로서 전승되는 것은 아니다. 도시화된 과천지역의 여건으로 이러한 민속놀이가 주민들의 놀이인 채로 남아 있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이 놀이는 보존과 전승이라는 차원에서 과천민속보존회 주도로 주로 대회 참가를 위한 공연형식으로 이루어진다. 놀이가 벌어지는 장소도 마을의 다리가 아니라 민속경연대회장이고 가끔 지역 행사에 나오기도 한다.

복원한 무동답교놀이의 형식은 다음과 같다. 분위기를 이끄는 음률은 이 지방 특유의 능개가락을 사용하며, 소품으로는 '국태민안 시화연풍'이라고 쓰인 대기 1, 영기 3와 악기가 있다. 악대편성은 장구, 큰북, 상쇠, 태평소, 소라, 징이 각각 한쌍이고 소고가 여럿으로 편성되었으며 무동은 별감, 나장, 소승, 팔복의 역이 각 한사람, 여무동이 두사람으로 모두 여섯이다. 이 외에도 밑무동과 외장녀, 방자, 길잡이 등이 출연하며 마을 사람들이 모두 참여해 대동놀이판을 벌인다. 놀이는 당나무 고사로 시작된다. 길라잡이가 놀이패를 당나무 앞으로 이끌어 옆으로 한줄로 서서 정중히 삼배를 하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한해의 태평을 빌며 신명나게 지신밟기를 한다. 다음엔 마을의 공동 우물을 겹으로 둘러싸고 비나리와 고사덕담을 하는 동안 놀이패들은 하늘에 대고 비손을 하기도 하고 두물에 절을 하는 우물고사를 지낸다. 그리고 밑무동의 어깨위에 애기무동을 태우고 무동놀이를 하면서 집사, 왜장녀, 양반광대 등의 잡색놀이를 한다. 놀이를 마치면 다리로 이동하여 제상에 제물을 놓고 다리고사를 지내며 한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한다.
다리고사를 마친 놀이패들은 다시 길라잡이를 앞세워 넓은 마당 한가운데서 큰 원을 그리며 무동 마당놀이를 한다. 이때 원을 그리기도 하고 엇갈려 돌기도 하는 '좌우치기'등도 선보이며 성대한 마당놀이를 펼친다.
마당놀이를 마친 놀이패들은 길라잡이를 따라 대형을 이루며 다리에 모이는데, 여기서는 선소리 패들이, 놀량, 앞산타령, 뒷산타령, 개구리타령 등을 부르고 그 동안 놀이패들은 흥을 맞춘다. 다리 위에는 다시 소승무동, 여무동, 별감무동, 나장무동, 팔복무동 등이 밑무동의 어깨 위에 올라가 좌우치기, 밀치기, 마당일체 등의 무동답교놀이를 한다. 무동답교놀이가 끝나면 집과 당나무를 돌아서 자연스럽게 뒤풀이를 하고 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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