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뉴스=손혜철 기자] 전직 방송인이자 현직 여행작가인 손미나는 쟌 모리스의 글을 두고 "볼 때마다 새로운 감상을 허락하는 사랑스런 축복"이라고 추천한다. 그의 나라인 영국에선 '제트 시대의 플로베르'라고 불린다는 80대의 노작가. 40대 중반의 나이에, 아내와 아이들까지 두고 남자에서 여자로 성전환을 한 작가, 게다가 그 아내였던 여인과 결혼 후 60년 만에 여성-여성 커플로 다시 법적으로 결합했다는 쟌 모리스.

남다른 인생을 산 그가 에베레스트부터 홍콩까지 77개 국, 91개 도시를 누빈 기록이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과 함께 책으로 묶여 나왔다.

성전환 에피소드를 중간에 두고 두 권으로 나뉜 '쟌 모리스의 50년간의 세계여행' 제1권은 독립의 진통을 앓던 아프리카, 분쟁의 현장인 중동, 혁명의 기운 넘치는 남미 등 희한한 세계의 구석구석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쓴 글들로, 거의 탐험기에 가깝다. 한편 성전환 후 글을 모은 제2권에서는 보다 느긋하고 부드러운 문체의 에세이들을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760쪽에 이르는 분량 내내 넘치는 플로베르스러운 묘사력들이 모리스의 기록들을 우뚝 두드러져 보이게 한다. "아, 사랑스런 허풍을 잃어버린 시카고여"라고 한탄할 때나, 2차대전의 끝에서 "백만 젊은이들의 망령으로 늘 괴로워하는, 백만의 꿈이 스러져간 땅" 유럽, "우아하지는 않아도 매료되는 도시" 모스크바, "늙지도 않는 고급 매춘부" 같은 레닌그라드 등의 문장을 만날 때 독자들은 훌쩍 시간을 뛰어넘는 독서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절묘한 본 줄거리와 아울러 자잘하고 부차적인 장식들을 음미하다 보면 베네치아의 쟌 모리스처럼 오르가즘에 가까운 전율에 휩싸이기도 한다.

재야사학자로서 '팍스 브리타니카' 3부작을 써내기도 한 모리스는 해박한 역사 지식을 가슴 뭉클한 모티브들로 묶어내는 데 남다른 재주를 가진 작가이다.

처참히 부서진 승전국 신세이던 전후 영국의 신기원을 위해 마련된 이벤트인 에베레스트 등정 기사 속 셰르파 텐징 노르카이의 모습이 그렇고, 최악의 아파르트헤이드를 목전에 둔 남아공에서 만난 '아프리카 저항운동의 마법' 크리스토퍼 겔의 모습이 그렇다.

영국군이 일본군에게 항복했던 장소를 찾아 간 싱가포르 에세이가 하필이면(나중에 알고 보니) CIA가 돈을 대 문화적 냉전의 공세 수단으로 활용하던 잡지에 실렸다는 첨언도 지난 70년대의 분위기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한다.

캘리포니아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독자라도 배처디와 이셔우드 커플 얘기를 읽으면 LA가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의 도시"라는 게 무슨 말인지 헤아리게 되고, "사자보다는 말벌에 가깝다"는 맨하탄 사람들의 힘이 어떤 건지 끄덕거리게 된다.

책을 덮으면서 독자들은 왜 쟌 모리스가 '친절당' 당수가 되고 싶어 하는지 깊이 공감하며, 그렇지 못한 현실에 더 깊이 안타까워 할 것이다. 어찌 보자면, 간단치 않게 살아온 어느 노작가의 지난 50년 여행하는 삶이 아무리 '특별관람석'에 앉아 구경하듯 대단하고 흥미로운 것이었더라도, 그 끝에선 결국 자분자분 고즈넉해지기 마련인 거다.

그 고요함 속에서 새로운 상상이 시작될 테고, 쟌 모리스의 글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대목은 바로 그런 독후의 상상에서이다. 이쯤 되면 정말 손미나의 말대로 상큼하고 사랑스러운 글읽기인 거다. 사진 투성이에 문학적 향취라곤 전혀 없는 여행서에 지친 독자들에게 쟌 모리스는 틀림없이 반갑디 반가운 오아시스이다.

박유안 옮김, 1권 352쪽, 2권 408쪽, 각권 1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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