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뉴스=천성남 기자] 이 사람 박희백 스크랩전문 ‘진명상회’ 대표)재부천군민회자문위원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늙어...(중략). 어느 누구라도 한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는 수구초심(首丘初心)으로 인생을 살게 마련이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오히려 퇴색되지 않고 더욱 강하게 마음을 잡는 것은 고향이 주는 애틋함이다. 보은군 마로면의 세중초를 졸업한 후 가족을 따라 대전으로 출향, 군무원생활 7년만에 다시 부천으로 옮겨 30여 년의 타향세월을 쌓아온 지 40여 년. 고향의 그리움을 달래려 오로지 재부천군민회를 통해 고향의 정을 나눠온 출향원로인 박희백(72·부천시 원미구 중2동)씨를 만났다.〈편집자 주〉

지난 2009년부터 고향후배 위한 장학금 전달

고향의 정을 서로 나누며 타향살이에서 오는 어려움을 위로받고 위로해주고 있는 재부천보은군민회(회장 한재학 탄부면 사직)가 지난 19일 고향후배들을 위한 장학금 전달과 회원 간 단합대회를 겸한 등반행사를 갖기 위해 60명의 회원들이 고향을 방문했다.
감사로, 자문위원으로 항상 군민회의 일이라면 사업을 제외하곤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그도 이번에 회원들과 함께 단체버스로 고향을 찾았다.
그날 군민회에서는 고향후배인 김성준(보은고1년, 내북 동산)군, 양은혜(대전 지족고2년 회남 신곡), 노하늘(보은여고 1년, 산외 오대)양 등 3명에게 150만원을 전달했다. 올해로 3회 째가 되는 이번 장학금 전달은 2년 전인 2009년부터 속리산면, 장안면, 마로면 등에서 각 1명씩 장학생을 선발해 전달해 왔다.

부천서 시작한 ‘고물상’ 인생절호의 기회

“예전엔 누구라 할 것 없이 ‘고물상’하면 천한 직업으로 여겼지요. 자본 없이 일자리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던 시절이라 미리 자리 잡고 살고 있는 여동생의 소개로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거였어요. 저는 대전에서의 7년간의 군무원 생활을 접고 부천엘 와서 첫 번으로 한 직업이 되었어요. 그게 30여년을 훌쩍 넘은 겁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이 일을 천직으로 여기고 가족들을 위해 정말 열심히 일을 해왔어요. 하루 8시간 넘게 리어카를 끌고 부천 인근을 돌아다녔지요. 이렇게 많이 벌 때는 20~30년 전에 10만 원 이상도 벌었으니까요. 당시 부천에는 공장들이 많아 정말 저에게는 호기로 다가왔어요. 그 때 연결된 공장들이 지금까지 연계돼 몇몇 공장은 아버지가 되물림 한 공장의 아들도 저와 연계하고 있어요. 그 중 고철로 납품 되는 공장은 유일철강, 비철에는 창성금속 등 여러 곳이 단골 기업으로 연계되어 있어요. 그동안 큰 것은 아니지만 성실과 믿음으로 쌓아올린 결과라 생각하고 스스로 보람과 위안을 찾곤 합니다.”

3남1녀의 성장에서 출가까지 ‘인생보람’

누가 보더라도 후덕한 인상을 풍기는 그는 고향을 떠난 지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뀐 40여 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시련이 있었는지 일일이 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아이들 키워 대학 보내고 시집장가 보내고 한 일 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군요. 아내가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지요. 저는 오랜 시간 밖에서 수거활동을 위해 다니는 동안 아내는 혼자서 살림하고 아이들 키우고 교육을 시키는 등 도맡아 해왔으니까요.”

군민회, 고향 느끼는 친목단체성격으로 결성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향의 그리움은 점점 커져가고 있다는 것을 각자가 알게 됐어요. 사업을 해 사는 데만 매달리지만 그래도 고향의 정을 느끼지 않고는 타향살이의 애환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하나하나 모였지요. 그래서 재부천군민회가 결성될 때 너무 기뻤습니다. 처음에는 몇몇 친목단체 성격으로 시작한 것이었지만 아무리 바빠도 저는 빠지지 않고 모임에 참석을 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회원들이 모두 형제자매 같다고 느껴집니다. 자주 모여 애환도 나누고 삶의 기쁨도 나누는 그 만족감은 타지에서 정말 필요한 것이라고 봅니다. 올 4월 퇴임한 김종식 전 부천군민회장은 그런 면에서 참 일을 많이 했어요. 여러 사람을 다독이며 사업으로 바쁜 와중에도 고향사람들을 위해 시간을 내어 자주 찾아오고 찾아가고 함으로써 서로 간 도타운 정을 느끼는 군민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매월 셋째 주 금요일은 정기 만남의 날이죠, 바로 이런 만남에서 정겨운 고향의 정서를 느꼈던 것 같아요.”

노후에도 내 직업 갖고 바쁜 생활하니 ‘행복’

“부천에는 인구 80만 중에서 충청도민이 35%를 차지한다고 해요. 그래서 그런지 충청도민 간의 결속력이 매우 크다고 봅니다. 분위기도 마치 그런 것 같아요. 서류 이해하고 아껴주어야 한다는 믿음 같은 것이 우리 부천군민회의 결속력을 다지는 비결이 아닐까합니다. 전국 어디를 가든 보은이 고향이라면 당연히 느껴지는 감성이 먼저 친금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대기업이나 소규모 공장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한평생 한 직업만을 갖고 걸어온 것은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에서도 성공보다는 일을 통해 보람과 자긍심을느끼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지금은 압니다. 노후이긴 하지만 제 일을 갖고 퇴직없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요즘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자식들에게 도움이 되면 됐지 부모로서 손을 벌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생활하고 있어요.”

대형화되는 스크랩 사업 ‘돈이 돈을 번다’

“저는 지금 사업을 작게 하고 있지만 비철금속 철금속 업체에게 적게는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의 보증금을 넣고 사업을 하는데 큰 사업가들은 억대가 넘는 큰돈을 업체에 집어넣고 사업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지요. 자원화가 되는 철금속이나 비철금속의 스크랩 사업은 돈이 돈을 번다는 것이맞는 개념임에 틀림없어요. 그래서 매력이 큽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자원이 부족하여 자원화가 되는 스크랩 사업이 큰 메리트가 되죠. 수십 년 간 해온 일이지만 아직도 전부는 알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자원화 사업은 미래를 비축하는 아주 중요한 자원을 재생산해내는 원료를 수집하는 일이지요.”

고희 넘었지만 아직도 일 관련 욕심 ‘여전’

“전에는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을 했지만 지금은 저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정년 없이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움직일 힘만 있다면 일을 할 수 있는 만년직장이 어찌 자랑스럽지 않겠어요. 같은 동년배의 나이를 보면 지금은 다 일에서 손을 놓고 집에서만 있지만 저같은 경우는 아침 일찍 나가 일을 하고 시간에 구애 없이 마음대로 일하는 일터가 정말 보람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다보니 가족들과도 더욱 친근감 있게 생활이 되고요. 딸들은 출가를 했고 막내아들과 함께 삽니다. 더불어 손녀딸과 사는 재미가 만만치 않아요. 누구라도 저같이 정년 걱정 없는 전천후 직업을 갖는다면 인생이 확실히 다르게 느껴질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인 임타순(69)씨와 오순도순 하루를 살아내는 소시민의 행복을 누리는 그는 나이도 잊은 채 마음은 어느 새 고향으로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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