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뉴스-이슈.기획] ◇중국 대표팀이 뽑은 수비형 유망주 - 리우 이(劉燚, Liu Yi) 
올해 스물 두 살, 키 183cm의 장신인 리우 이는 세계 최고의 수비형 선수로 꼽히는 한국의 주세혁과 같은 수비형 선수다.

 2015년 1월 중국의 국가체육본부에서 ‘우수 운동선수’라는 호칭을 수여할 만큼 중국 탁구계의 신예로 떠오른 리우 이는 어릴 적부터 공을 깎아 치는 수비 탁구의 신동으로 유명했다.

 리우 이는 4살 때부터 쓰짜좡(石家庄)시의 초등학교를 다녔다. 허베이성(河北省)에서 유일하게 국가지정 탁구 전문 훈련팀이 있는 초등학교로, 이곳에서의 훈련 과정을 마치면 곧바로 쓰짜좡시의 탁구팀에 입단할 수 있어 더 유명해진 곳이었다.

 특히 리우 이가 훈련을 받았던 탁구 전문 훈련팀은 1959년에 개설되어 각종 대회의 우승을 휩쓸었던 야오 구어챠이(yao guocai, 姚国才), 쩡 웬(zheng yuan, 郑源), 쉔 옌페이(shen yanfei, 沈燕飞) 등 다수의 국가대표 출신 스타 선수들을 배출한 명문이다. 리우 이는 최근 이곳에 국가대표 선수로 자신의 이름을 더했다.

 워낙 유명세를 탔기 때문에 리우 이가 다녔던 초등학교 탁구팀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탁구를 배우려는 아이들이 가득했다. 어떤 아이는 대학교 입학 시 가산점이 추가되기 때문에 탁구를 배우러 왔고, 어떤 아이는 자신의 장기를 키우기 위해 배우겠다고 했다. 각자의 동기에 따라 훈련 과정이 달랐고, 리우 리는 그 중 가장 어렵다는 탁구 선수의 길을 택했다.

 코치가 탁구의 기본 동작 훈련을 위해 가는 밧줄로 리우 이의 팔을 묶어서 일일이 동작을 가르칠 만큼 모든 훈련 과정이 엄격하게 이루어졌다. 게다가 당시 탁구 훈련팀에 갓 들어온 리우 이는 몸집이 마르고 키가 큰 신체적 조건 때문에 공을 깎아 치는 수비형 선수에 적합하다는 평과 함께 탁구 선수로서의 방향을 결정하게 된다.

 리우 이는 평소에는 아주 순하고 착한 아이였지만, 일단 경기를 시작하면 무서운 호랑이로 변했다고 한다. 샹양 컵(向阳杯) 전국 초등학생 탁구대회에 출전했을 때도 리우 이는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상대 선수를 물어뜯을 듯한 태도로 경기를 이끌었고, 이런 기질 덕택에 리우 이는 허베이성(河北省) 탁구팀의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탁구선수로서 본격적인 훈련을 마친 리우 이는 2006년 전국 U17대회에 출전한다. 규모가 큰 전국대회 첫 출전에서 그는 국가대표팀 코치들의 주목을 받았다. 비록 경기 중 리우 이의 손가락 골절로 순위권 안에 진입하지는 못했지만, 국가대표팀 코치에게 눈도장을 확실하게 받은 리우 이는 다음 해인 2007년 정식으로 국가대표 2진에 합류하게 된다.

수많은 경쟁을 뚫고 국가대표팀이 된 리우 이는 대표팀 내에서도 공을 깎아 치는 수비형 유망주로 떠올랐다. 현재 국가 대표팀에는 베이징팀의 허우잉차우(侯英超)와 리우 이, 모두 2명의 수비형 탁구 고수가 있는데 중국 탁구계에서는 리우 이가 나이도 더 어리고 타법도 우수해 더 큰 가능성을 가진 선수라는 평을 받고 있다

 허베이성(河北省)의 탁구부 코치 말에 의하면 “1992년 출생, 심지어 1995년과 1996년에 출생한 선수들 중에서도 양질의 어린 인재들은 별로 없다. 그중에서도 수비형 선수는 리우 이가 유일하다”고 한다.

 이번 유니버시아드에서 리우 이는 탁구 남자 단식과 복식, 남자 단체, 혼성 복식 등 다양한 세부종목에 출전한다. 가장 먼저 결승을 치른 단체전에서 이미 일본팀을 꺾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앞으로 남은 경기에서 또 어떤 색깔의 메달을 추가할지 기대와 관심이 모아진다.

◇태권도 여자 67kg이하 급의 금메달리스트-중국의 꿔 윤페이(郭耘菲, Guo Yunfei) 

꿔 윤폐이는 1991년 허난성(河南省) 쩡쩌우시(河南郑州)에서 태어났다. 허난성 체육국 간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녀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운동과 접할 수 있었고, 처음에는 남들보다 큰 키 때문에 농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2002년 들어 그녀의 인생을 180도 바꾸어 놓은 사건이 일어났다. 11살의 꿔 윤페이가 체육관에서 농구 훈련을 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허난성에는 국가대표팀 태권도 코치가 어린 선수들을 선발하기 위해 각 학교마다 체육관을 둘러보며 대상을 물색 중이었다. 마침 농구 연습을 하던 꿔 윤페이의 모습이 코치의 눈에 들어왔다. 긴 팔다리를 사용해서 쉴새없이 달리며 강한 슛을 쏘는 모습에 코치는 꿔 윤페이를 주목하게 되었고, 그녀는 농구 대신 태권도 선수로의 길을 걷게 된다.

 같은 해 꿔 윤페이는 코치의 권유로 곧바로 베이징 체육대학교에 특별히 마련된 태권도 팀에 들어가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는 태권도 선수로서 유연한 몸놀림과 강한 킥을 구사했으며, 학습 능력도 뛰어났다. 특히 180cm가 넘는 장신을 이용해 푸싱 킥, 아래 찌르기 등의 어려운 기술을 자유자재로 소화해냈다. 그렇게 태권도를 시작한 지 4년이 지난 2006년 그녀는 마침내 국가대표팀에 합류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첫 국제대회인 2006년 세계 청소년 태권도선수권대회 여자 63kg이하 급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2008년에는 체급을 바꿔 아시아 태권도 선수권대회 여자 67kg이하 급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하지만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었다.

 2008년 아시아 태권도 선수권대회 대회 2일째였다. 여자 67kg이하 급 결승전에서 꿔 윤페이의 점수가 계속 앞서는 중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라운드 종료 17초 전 서로 격렬하게 충돌하는 바람에 꿔 윤페이는 상대방의 오른쪽 무릎 킥을 맞고 부상을 입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경기를 리드하며 금메달을 땄다. 부상에 대해서도 그녀는 오히려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경기 중에 부상을 입는 것은 태권도 선수의 일상이다. 경기 중에 과도하게 긴장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마지막 대항이 지나치게 격렬해서 다리를 다치게 됐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이후 꿔 윤페이는 태권도 여자 67kg 이하 급으로 체급을 고정하고 각종 국제대회에 출전해오고 있다. 2009년 코펜하겐 세계 태권도 선수권 대회에서는 5위에 그쳤지만, 2년 뒤 한국 경주에서 열린 2011 세계 태권도 선수권대회에서는 당당하게 은메달을 따내며 설욕전에 성공했다.

또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과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는 두 번 모두 금메달을 획득했고, 2011년 센젠 유니버시아드에서도 여자 67kg 이하 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다.

 이렇듯 국제대회에서 화려한 기록을 남기며 승승장구 하는 꿔 윤페이는 중국에서 “작은 천쭝(小陈中)”으로 불린다. 천쭝(陈中)은 태권도 국가대표팀 출신으로 해마다 열리는 전국선수권대회에서 장장 11년 간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비롯해 각종 세계 선수권대회에서도 여자 67kg이하 급의 금메달을 따낸 중국 태권도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게다가 꿔 윤페이와 같은 허난성 출신에 농구로 운동을 시작했다가 태권도로 종목을 바꾸며 인생의 성공가도를 달렸다는 점도 같아서 천쭝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던 중국인들은 그녀를 닮은 꿔 윤페이에게 “작은 천쭝(小陈中)”이라는 애칭을 붙여줬다.

 이번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에서도 꿔 윤페이는 태권도 여자 67kg 이하 급의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지난 센젠 유니버시아드에 이어 두 번째 도전인 이번 대회에서도 역시 금메달을 획득하며 대륙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중국의 태권도 대표팀의 간판스타로서 이번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넘어 내년 리우 올림픽까지 세계로 뻗어나갈 그녀의 행보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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