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두 신부

아나로그와 디지털,
타자기와 컴퓨터,
사람과 기계,
나와 남,
시간 공간 인간,
천천히와 빨리빨리

찰나의 시간을 아까와 하는 사람도 찰나의 시간을 값있게 보내는 사람도 없는 듯 하다.
어떤 깨달음 때문에 시간을 아낄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탓일까? 아니면 어리석음 때문에 시간을 아낄 이유조차 모르기 때문일까?
어리석기 때문에 시간을 아낄 줄 모르는, 어리석기 때문에 시간을 값있게 쓰지 못하는 게으른 우둔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찰나의 짧은 시간은 멍하니 의식하지 않더라도 그 짧은 시간이 계속 흘러가 버린다. 찰나는 활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찰나를 아는 순간 이미 놓친 것이다. 우리는 찰나를 산다. 살고 있고, 살아야 하지만 아는 순간 매 순간 찰나를 놓친 격이 된다.
찰나를 잡을 수는 없는 것인가?

사제인 성직자인 나나 불도를 닦는 수행자나 신자나 보살들 우리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찰나를 인식하는 것이다.

神을 사는 사람은 道를 수행하는 사람은 막연하게 먼 장래의 세월을 아까워해서는 안된다. 눈 앞의 이 한순간이 헛되이 지나가는 것을 안타까워해야만 한다. 찰나를 말이다.
만일 神이 당신의 목숨이 남은 시간이 내일까지밖에 없다고 알려준다면 오늘 아침 뜬 해가 저물 때까지 당신은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이라는 날도 내일이면 죽으리라는 그 날과 별로 다를게 없다.

우리는 매일 하루 동안 밥먹고 똥오줌을 가리며 잠자고 말하고 걷는다. 주어진 일과 어쩔수 없이 해야 할 일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얼마되지 않는 나머지 시간을 이롭지 않은 일을 하고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며 시시한 일을 생각하면서 한 시간을 흘려 버리고 또 하루를 보내며 그것이 쌓여 한 달이 되고 일년이 되고 급기야는 일생을 헛되게 보내게 된다. 이것이 찰나를 놓친 인생이다.
한 순간이라도 시간을 아끼는 마음이 없다면 죽은 자와 다를 것이 없다.
한 순간이라도 진정성을 유지하고 큰 뜻을 배우고 익혀 자성을 잃지 않는 행실을 입으로, 손으로, 발로 살지 않는다면 참으로 산다고 말할 수 없다 할것이다.

그렇다면 찰나를 놓치 않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가?
시간을 아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그 한 가지가 좋은 몫이 되는 것이다.
마음속의 잡념을 쓸어내고 주변의 번잡한 일에 얽매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멈추고자 하는 자는 멈추고, 수행하고자 하는 자는 수행하는 것이다.
찰나는 시간과 공간과 인간을 연결시켜 주는 고리이다. 이 고리를 부여잡을 때 찰나를 산 것이 된다.
 

저작권자 © 불교공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