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 기념 사업회 옮김>

 

 

 

육영수 여사는 1938년 죽향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배화고등여학교에 6대 1이라는 높은 경쟁을 거쳐 입학했다. 충청도에서 온 학생으로는 유일한 입학생이었다. 육여사는 시골 국초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치열한 경쟁을 거쳐 입학했다 해서 1학년 때부터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선생님들의 귀여움을 받았다.

육여사는 몸가짐이 늘 단정했다. 당시 여학생들은 주름치마를 입었는데 주름이 한 번도 펴진 것을 볼 수 없었다. 특히 육여사는 머리숱이 많았지만 항상 곱고 단정하게 빗은 모습이었다. 성격이 차분한 육여사는 늘 조용한 미소를 짓는 얌전한 학생이었다. 친구들과 다툰 적도 없었다. 너무나 순진하여 소풍을 가 노래를 시키면 숨어 버리고 마는 성품이었다. 또한 자신을 내세우는 법이 없었다. 언행이 겸손하고 검소해서 육여사가 옥천의 부잣집 딸이란 사실을 졸업할 때까지 모를 정도였다.

이렇게 얌전한 모범생이었던 육여사는 웃어른의 말을 거역하는 일도 없었다. 졸업기념 수학여행을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 어른들이 허락을 해주지 않아 가지 못했다. 그러나 육여사는 어른들을 원망하거나 불평을 하지 않았다. 육여사는 재봉과 수예에 뛰어나 전 학년에서도 으뜸이었다. 그래서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 곧잘「시집가서 잘 살겠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졸업을 하자 육여사는 옥천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집에서 가사를 돌보고 있었다. 그런데 옥천여학교에서 선생으로 나와 달라는 부탁이 왔다. 육여사는 청을 받았을 때「자신이 없는데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하고 망설였다. 매사에 조심하는 여사로서는 당연한 걱정이었다. 그러나 학교에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학생들은 육여사를 무척이나 따르고 좋아했다. 학생들은 다정하고 친절한 그리고 상냥스런 육여사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육영수 여사는 1925년 11월 29일(음 10월 14일) 충북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 덕유산기슭 육종관씨와 이경령 여사사이의 1남 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육여사의 아버지 육 종관씨는 성실한 독농가로 인근에 이름이 알려진 보수적인 토호였다. 한편으론 미신타파, 근대문명에 대한 깊은 동경과 신지식에의 민감한 반응, 과학적인 사고방식과 기계류에 대해 남달리 관심이 많았다.

또한 육여사의 어머니 이경령 여사도 후덕한 마음씨에 많은 식솔들을 거느리며 큰살림을 해내는데 조금도 빈틈이 없는 분이었다. 이경령 여사의 태몽은 '집마당으로 기어든 거북을 안고 안방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남달리 우애가 깊었던 형제는 오빠 육인수와 언니 육인순(72년 작고)여사, 동생 육예수 여사였다.

어릴 때부터 '마음 착한 교동집 작은아씨'로 이름이 나 있었던 육여사는 진흙 속에 물들지 않은 군자의 기품을 지니고 있는 연꽃, 철 따라 피어나는 꽃밭의 꽃들, 그리고 뒤뜰의 백년이 넘은 아름드리 은행나무, 감나무 속에 묻혀서 꿈 많은 소녀시절을 보냈다.

육여사는 소녀 때부터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다. 동생의 옷을 지어 주기도 했다. 얌전하고 예의바른 육여사는 다락에 가득 쌓인 현금 관리를 맡았기도 했던 살림꾼 아버지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육여사는 8세에 죽향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급우들은 모두 육여사보다 한 두 살, 많으면 5, 6세 위였다. 제일 나이가 어렸고 키가 작은 육여사는 항상 앞자리에 앉았다. 비교적 말수가 적고, 온순했으며 언제나 웃음이 떠나지 않는 얌전한 학생이었다.

육여사는 다른 학생들에 비하여 부유한 가정이었으므로 학용품도 넉넉했다. 육여사는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 연필이 없으면 거의 새 것이나 다름이 없는 연필을 주는 것이 예사였다. 그래서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독차지했다.

공부가 끝나고 청소를 하게 되면 누구보다도 열심히 청소를 했다. 책상을 반듯하게 정돈하거나 유리창에 손자국 하나 없이 꼼꼼하게 닦아 놓고서야 집에 가는 것이었다. 육여사의 학교 성적은 45명중 언제나 5등 이내였다. 특별히 어느 한 과목에 치우치지도 않고 전 과목에 걸쳐 고루 성적이 좋았다.

죽향 국민학교를 졸업할 무렵 육여사는 친구들에게 장차 '교사가 되겠다' 는 꿈을 말하기도 하여 그 착하고 아름다운 인품을 소녀시절부터 보여주었던 것이다.

충청북도 옥천출신으로서 종관(鍾寬)과 이경령(李慶齡) 사이의 차녀이다. 옥천읍내 죽향국민학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배화여고를 졸업한 뒤 옥천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50년 전란으로 부산에 피난중일 때 육군 중령 박정희와 혼인하여 슬하에 1남2녀를 두었다. 1961년 박정희장군이 5.16 군사 혁명을 주도하여 성공한 뒤 1963년 10.15총선거에서 6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연임됨에 따라 대통령 영부인으로 11년간 내조하였다.

 

만년의 공직은 양지회(陽地會) 명예회장과 자연보존협회 총재였으나, 평소 재야 여론을 수렴하여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를 계속하는 가운데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는 말도 들으며 남산에 어린이회관을 설립하는가 하면, 서울 구의동 일대에 어린이대공원을 조성하고 정수 기술직업훈련원 설립을 비롯하여 재해대책기금조성과 정신박약아 돕기 운동 등 그늘진 곳을 직접 찾아다니며 사회복지사업에 분망한 일과를 보내었다.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 창간과 서울대학교 기숙사 정영사를 건립하였다. 경향 각처의 여성회관 건립은 물론 연말마다 고아원, 양로원을 위문하여 따뜻한 구호의 손길을 미쳤고, 전국 77개소의 음성나환자촌까지 일일이 순방하면서 온정을 베풀었다.

1974년 8.15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서울국립극장 단상에서 문세광(文世光)에 저격당하여 서거하셨다. 박정희대통령 저격사건에 희생양이 된 격이어서 애도 인파가 청와대에 연일 쇄도하였는데, 국민장영결식이 8월19일 오전10시 중앙청(현 국립중앙박물관) 광장에서 각국 조문사절과 내외인사 3,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고 이날 오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묘비는 백일탈상 하루 전인 1974년 11월21일에 제막되었으며, 이듬해 기념사업회도 발족되어 추모책자를 펴냈다.

1963년 12월 17일. 육여사 38세 때 제3공화국의 퍼스트레이디로 청와대의 안주인이 되었다. 육여사는 청와대 생활이 시작되자 세 가지 일을 실천에 옮겼다.

그 첫째가 열심히 공부하는 일이었다. 다음은 많은 사람을 만나 시중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끝으로 청와대의 살림을 중류 가정 정도로 하는 것이었다.

시장의 얘기와 관심사를 토대로 대통령께 직접 건의하여 <청와대 야당>으로 불리기도 했다. 육여사는 사회 각층으로부터의 들은 얘기를 그 나름으로 옳다고 생각되는 일이면 서슴없이 박대통령에게 직언했으며, 또한 솔직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때로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박대통령이 들어주지 않을 때에는 <나는 정권 야욕도 조직도 없는 사람>이라는 슬기로운 농으로써 우회작전을 펴기도 했다.

육여사는 새벽 6시부터 밤 1시가 넘을 때까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바쁜 생활을 해야만 했다. 늘 고된 하루였다. 자녀들이 등교하고 난 7시 반부터 조반을 들기까지의 1시간 동안은 조간신문을 읽고 라디오를 들으며 대통령의 판단에 도움이 되도록 메모를 하거나 신문에 언더라인을 치는 일이었다.

9시경 식사가 끝나 박대통령이 집무실에 들어서면 육여사의 민원처리가 시작되었다. 하루에 50여 통이나 되는 서신을 일일이 읽어보고는 정성껏 답장을 해주기도 하고 좋은 일도 베풀어 주었다.

그런 바쁜 틈틈이 가족의 식단을 짜거나 옷가지를 매만지거나 실내장식에 마음을 쓰는 등 생활 주위의 정리를 했다. 그러다 보면 점심시간이 되었다. 박대통령과 함께 또는 혼자서 외부 손님을 초청하여 오찬을 나누었다. 하오는 접견시간이었다.

외국의 빈객을 비롯하여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 각 단체의 간부나 회원들, 벽촌의 어린이들, 새마을 지도자들, 일반 서민층 주부에 이르기까지 접견, 그 수많은 손님들에게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했다.

하오 4시부터 6시까지는 공부시간이었다. 여러 전문 학자들을 초빙하여 세계사·문화사·종교사·역사·지리·철학·고고학·경제학·교육학·외교 정치사·시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공부를 했다. 6시가 넘으면 가족과 함께 단란한 식사를 나누었다. 불가피한 일로 박대통령이 불참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전 식구가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했다. 때로는 예고 없이 허물없는 손님이 동석하기도 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석간신문을 살피고 라디오, 텔레비전의 뉴스를 체크하고, 자녀들과의 대화, 독서, 하오에 도착된 편지를 읽는 등 밤 1시가 될 때까지 일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보통의 육여사의 일과이지만 봉사활동, 지방시찰 등의 일이 겹칠 때는 눈코 뜰 새가 없게 된다. 한편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무엇 하나 변변하게 갖춰진 것이 없던 시기에 선물포장을 제대로 하기위해 고심하고, 한국적 미각의 요리를 마련키 위해 꾸준한 노력과 연구를 거듭하고, 외빈의 편안한 방문을 위해서, '진실은 누구에게나 통하며 신의는 동서를 막론하고 믿음을 갖게한다' 고 말하며 따뜻한 정과 창의적인 기지를 발휘한 육여사는 그야말로 알뜰한 주부, 슬기로운 퍼스트레이디로서 선구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또한 외국을 방문할 때나 청와대에서 손님들을 접견할 때에도 언제나 한복을 즐겨 입었는데 이는 우리 한복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널리 인식시킬 수 있었고 외국을 방문할 때마다 '우아하고 매혹적인 퍼스트레이디'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런 분주한 생활을 보다 못해 주위에서 너무 고되지 않느냐고 얘기하면 육여사는 서슴지 않고 「내 생활신조는 항상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면서「최선을 다하지 못했을 때는 마치 숙제를 하지 않은 학생과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언제나 차분한 여유와 부드러운 미소, 유쾌한 위트와 유머가 육여사의 주변에서 맴돌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 사업회 옮김> 홈페이지 http://www.516.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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